세종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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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선택 사람을 살찌우고, 인재를 발탁하고, 문명으로 나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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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87332671
쪽수 : 312쪽
백승종  |  사우  |  2021년 07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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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정치가 세종은 조선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세종의 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역사가 백승종이 선입견 없이 살펴본 세종과 그의 시대 처음으로 만나는 ‘입체적인’ 세종 세종은 성군이나 현왕으로 불린다. 간혹 세종으로 인해 노비 인구가 급속히 팽창했고, 기생제도가 창출되었으며 사대주의가 극심했다고 세종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는 세종에 대해 완전무결한 영웅 혹은 조선 사회의 폐단을 만든 장본인이라는, 미화되거나 폄훼된 상을 갖고 있다. 이 시대 대표적인 역사가 백승종이 정치가 세종의 진면모를 선입견 없이 들여다보았다. 저자는 세종을 한 사람의 정치가로서 바라본다. 세종이 중요하게 생각한 몇 가지 사업을 검토하면서 세종이 어떤 정치적 입장과 태도를 견지했는지, 어떻게 신하들을 설득하고 협상했는지, 세종이 탁월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살펴본다. 유능한 정치가였던 세종이 복잡다단한 현실을 헤쳐나가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는지 톺아보는 일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가 이 책을 쓰면서 가장 주력한 부분은 “세종의 언행을 선의로든 악의로든 함부로 과장하지 않으려고 애쓴” 점이다. 그 결과 우리는 납작한 세종의 얼굴이 아니라 ‘입체적인’ 세종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세종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결함이 있는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다만 그에게는 범인이 따르지 못할 큰 포부가 있었고, 웬만해서는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성실성이 있었다. 우리가 그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 소개
저자 : 백승종 정치, 사회, 문화, 사상을 아우르는 통합적 연구, 통사와 미시사를 넘나드는 입체적 접근으로 다양한 주제의 역사를 쓰는 보기 드문 역사가이다. 동서양 역사에 폭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을 시민과 공유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독일 튀빙겐대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해 서강대학교, 독일 보훔대학교, 베를린자유대학교,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경희대학교, 건국대학교, 풀무학교,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등에서 역사, 문화, 종교, 문학 등을 폭넓게 연구하고 가르쳤다. 한국사와 서양사를 비교 분석해 《상속의 역사》, 《신사와 선비》, 《도시로 보는 유럽사》 등을 집필했고, 한국의 전통사상을 재해석해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조선의 아버지들》 등 20여 권을 저술했다. 깊은 안목과 섬세한 해설, 깊이 있는 통찰로 독자와 학계의 호응을 얻어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으로 각각 한국출판평론학술상,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았다.
목 차
프롤로그 | 세종과 그의 시대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제1부 경제: 사람을 살찌우는[富民] 길 1. 아무도 굶지 않는 나라를 위하여 2. 강한 의지로 심각한 치안 문제를 해결하다 3. 세제 개혁으로 세 마리 토끼를 노리다 4. 북방 영토 확립한 ‘파저강 정벌’ 100일의 기록 5. 남쪽 백성 이주 ‘사민정책’, 조선의 북방을 지키다 6. 시대를 앞서간 화폐정책의 교훈 제2부 정치: 인재를 발탁하는[擇賢] 길 7. 전염병, 의약 전문화로 대응하다 8. 유난했던 화포 사랑 9. 집현전과 함께 새시대를 열다 10. 세종이 인재를 관리한 네 가지 방식 11. 믿음직한 조력자들 12. 안숭선이라는 이름의 프리 즘 13. 왕에게도 실수는 있었다 제3부 문화: 문명(文明)으로 나아가는 길 14. ‘성리학적 전환’이라는 깃발 15. 훈민정음: 백성이 글을 배우면 세상이 밝아진다 16. 맨 처음에 독서가 있었다 17. 명나라 사신에게 재갈을 물리자 후세의 평가: 역사의 이정표 18. 조광조는 세종의 시대를 되찾고 싶었다 19. 큰선비들의 눈에 비친 세종
출판사 서평
“세종처럼 소수자를 살뜰하게 챙긴 왕은 없었다” 약자를 배려한 진정한 성리학자 이 책의 1부에서는 세종의 경제정책에 대해 알아본다. 세종 즉위 당시 조선의 농업생산력은 매우 낮아서 굶주리는 백성이 많았다. 게다가 이상기온으로 가뭄과 홍수가 극심했다. 먹고살 길이 막막해 사방으로 떠도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연쇄 방화 사건도 자주 일어나 치안 문제가 심각했다. 세종은 농사 기술을 보급하고 치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근본적이고 체계적으로 해결책을 찾아나갔다. 세종은 세금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전국 규모로 여론조사를 실시할 정도로 신중하게 개혁 정책을 폈다. “여론을 존중하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공정한 조세제도를 마련해 나간 세종의 정치적 조치는 현대적”이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세종은 정책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장애인, 여성, 노비, 아이, 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먼저 배려했다. 관비의 출산휴가를 7일에서 100일로 연장해주기도 하고, 옥에 갇힌 죄수들의 건강을 살피기 위해 전국의 조옥도를 작성하기도 했다. 전염병이 유행할 때는 천민과 백성을 구제하는 데 역점을 두다 보니 관리들이 역차별이라고 하소연을 할 지경이었다. 이처럼 세종은 기득권층보다는 소외된 이들의 안위를 먼저 챙기고 약자를 보호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유교는 백성이 먹고 입는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게 하는 것이 왕의 책무라고 가르친다. 조선의 왕과 재상은 이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도 세종처럼 백성을 살뜰히 보살피지 않았다. 알면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 점에서, 세종은 진정한 성리학자였다.” 유교의 가르침을 세종처럼 철저하게 실행한 왕은 없었다. 그런데 성리학이 더 깊이 뿌리 내린 후대에는 이러한 정신이 오히려 사라지고 말았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이데올로기가 과잉된 사회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세종의 독특한 인재 관리 방식과 정치력 이 책의 2부에서는 인사정책을 중심으로 세종의 정치적 능력을 알아본다. 세종은 백성이 편안하게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재를 양성하고 등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세종 대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했다. 당시 의료 수준으로는 전염병을 근본적으로 퇴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종은 손 놓고 있지 않았다. 우선 의료 전문가를 양성하는 데 주력했다. 피해 규모를 조사하고 구제 대책을 마련하는가 하면 약방문을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도성은 어느 정도 관리가 되었지만 지방민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지방에 의원을 별도로 배치했다. 전염병에 맞서 노력한 결과 조선의 의약 수준은 한층 높아졌고, 질병 관리 능력도 나날이 향상되었다. 의학 서적도 간행했다. 그 결과 당시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의학 수준을 갖추게 되었다. 세종은 전문가를 양성하는 일이 중대하고 시급하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닫고 인재 양성에 주력했다. 세종 시대에는 유교 경전 전문가뿐만 아니라 공학자, 수학자, 통역관 등 다방면에서 전문가들이 활약했다. 실용주의자 세종이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집현전은 국가를 이끌어갈 다양한 전문가를 길러낸 산실이었다. 집현전은 설립 초기에는 개혁을 주도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세종의 개혁 정책에 걸림돌이 되었다. 우리가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집현전의 실체를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종 곁에는 믿음직한 조력자들이 있었다. 황희, 맹사성, 허조, 최윤덕 등인데, 세종은 이들의 장단점을 정확히 알고 각자 장점을 발휘하도록 했다. 그 때문인지 당시에는 대신들 간에 갈등이 있었으나 당파싸움으로 악화되지는 않았다.” 세종이 조정 대신을 감독하고 설득하는 방법은 특이했다. 저자는 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던 안숭선의 행적을 면밀하게 검토한다. 황희와 세종의 관계도 각별했다. 조속히 개혁을 완수하고자 했던 세종과 속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 황희는 조화롭게 팀워크를 이루었다. 안숭선과 세종, 황희와 세종의 관계를 통해 세종의 통치 스타일을 이해할 수 있다.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은 실용주의자 세종 조선을 성리학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대형 프로젝트를 시작하다 3부에서는 세종이 이루고자 한 유교적 문명화 과정을 살펴본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성리학 공부에 매진했다. 철저한 성리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조선은 문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15세기에는 가족을 살해하거나 막심한 불효를 저지르는 사건이 많았다. 늙은 부모를 내다버리는 고려장이 횡행했고, 근친상간, 동기간의 재산 다툼도 흔했다. 세종은 조선을 성리학적인 이상 사회로 개조하고자 했다. 세종은 《삼강행실도》와 《국조오례의》 등의 책자를 편찬해 백성을 교육하고자 했다. 간통사건을 조사해 처벌하고, 근친 간의 결혼을 엄금하고, 이혼을 막았으며, 조혼제라는 법률을 만들었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조선의 문명화를 반드시 실현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사실상 훈민정음 창제도 문명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세종은 교육의 힘을 굳게 믿었다. 백성에게 도덕을 가르치고 싶어도 백성이 글을 모르니 방법이 없었다. 배우기 쉬운 우리 문자가 꼭 필요했다. 이런 신념이 있었으므로 어떠한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한글을 창제할 수 있었다. 우리는 ‘글자를 몰라서 억울한 일을 겪는 백성을 불쌍히 여겨’ 한글을 창제했다고 간단히 설명하고 만다. 하지만 저자는 “한글 창제는 ‘문명화’, 즉 성리학적 전환이라는 대형 프로젝트의 일부”였다고 분석한다. “세종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조선에 새로운 사회질서가 등장했다. 유사 이래 성리학 이념에 가장 충실한 나라가 조선이라는 데 이론이 있을 수 없는데, 성리학 국가라는 새 패러다임은 세종에게서 나왔다. 후세와 차이가 있다면 왕의 태도는 경직된 이념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맹목적으로 이념을 지키기보다는 실용적인 쓰임새가 더 중요했다. 유학에 밝았던 성종, 선조, 영조, 정조 등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세종에게도 한계와 실수가 있었다 저자는 세종의 실수와 한계도 짚고 넘어간다. 세종의 자녀 사랑은 지나쳤고, 대군들의 사치가 심했다. 친인척의 비리도 눈감아주기 일쑤였다. 세종은 며느리를 4명이나 내쫓았다.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경우였다. 세종이 별세하자 영응대군은 부왕이 쫓아낸 송씨를 다시 데려왔으니 세종의 이혼 결정이 강압적이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반면 신하의 이혼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름난 학자 김숙자는 집안 어른들의 강요로 이혼을 했는데, 왕은 벌을 주고 재결합을 명령했다. 김숙자는 이혼 사건 때문에 끝내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세종은 이른바 성군도 아니었고, 완벽한 인격체도 아니었다. 그에게도 실수는 있었고 판단 착오도 없지 않았다. 우리의 지레짐작과는 달리 왕은 가정을 화목하고 공평하게 다스리지도 못했고, 정실에 끌려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여러 대군을 조정에 함부로 끌어들여 훗날의 분란(세조의 왕위 찬탈)을 자초한 점도 허물이라면 허물이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매사에 공정하고 결함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다. 세종은 뛰어난 왕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세종에게도 인간적인 한계나 판단 착오는 있었다. 완전무결한 성군이나 현왕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지 않겠는가. 개혁 정치가 조광조는 세종의 시대를 되찾고자 했다 4부에서는 세종에 대한 후세의 평가를 소개한다. 유교적 이상 정치를 꿈꾸었던 개혁 정치가 조광조는 세종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저자에 따르면 조광조와 그의 동지들은 세종을 모범으로 삼았다. 저자는 조광조 일파의 육성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들려준다. “그들이 가장 주목한 것은 왕과 대신의 상호보완적이고 유기적인 역할이었다. 짐작하건대, 조광조는 자신의 미래 역할을 황희 정승에게서 발견했고, 중종에게는 세종을 배우라고 요구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주문이었다. 중종에게는 세종과 같이 너른 포부도 깊은 학식도 없었고, 조광조에게도 황희의 단호하면서도 유연한 도량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조선 후기의 큰선비들도 세종의 시대를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했다. 많은 학자 중에 매사에 가장 비판적인 인물로 꼽히는 농암 유수원은 세종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세종은 그공적이 동방의 요순에 해당했다. 그 시절에는 백성도 평안했고 물자도 풍성했다. 풍속이 아름다웠으며 교화가 크게 이루어졌다.” 유수원은 세종을 극찬했다. 유수원은 세종이 인재를 등용하는 데 재능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노비를 살뜰하게 돌본 점도 높게 평가했다. 다산 정약용을 비롯해 많은 선비도 세종에 대해 호평을 했다. 일부 비판적인 견해도 있었다. 이 책에서 자세한 내용을 만날 수 있다. 우리 시대에 세종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문화는 역사의 산물이다. 우리가 지나칠 정도로 공부를 중요시하는 것, 남녀를 유별하다고 여기는 것은 세종이 남긴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세종과 세종의 시대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필요한 일이다. 이를테면, 세종을 순진한 사대주의자였다고 비판하기에 앞서 실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세종은 사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명나라가 요구하는 조공을 성심성의껏 준비했다. 그러면서도 명나라 사신들의 무리한 요구와 횡포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방법을 궁리했다. 저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사대적이었으나 실상을 알고 보면 세종의 사전에 무조건적인 사대주의는 없었다”라고 분석한다. 우리는 여전히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눈치를 살펴야 하는 처지이다. 지나치게 미국과 일본에 의지하려는 이들도 있고, 국수주의를 외치는 이들도 있다. 우리가 세종의 균형 감각과 정치력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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