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캐럴 김옥수 지음 | 비꽃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여자아이가 토끼굴 아래로 떨어져서 다양한 동물을 만난다는 내용으로, 어른과 어린이 모두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문화와 문학에, 판타지 장르에 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영화와 연극과 그림과 발레와 컴퓨터 게임으로도 나왔다. 하지만 작가가 논리학과 수학을 활용해서 어린이를 즐겁게 한 이야기는 정말 우연히 생겨났다. 캐럴은 동생이 여덟 명이나 되는 덕분에 어린애들과 친하게 지내는 게 자연스러웠다. 말을 심하게 더듬어도 아이들한테는 아니었다. 캐럴이 가깝게 지내던 아이들 가운데는 작가 조지 맥도널드 자녀와 시인 앨프레드 테니슨 아들도 있었다. 하지만 옥스퍼드 크라이스트 처치 단과대학 학장 헨리 조지 리델의 세 딸 로리나·앨리스·에디스와 특히 가깝게 지냈다. 대학에선 학장만 결혼하고 교내에 거주할 수 있어, 크라이스트 처치에 세 여자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세 여자애는 가정교사 프리킷에게 엄격한 예절교육을 받으며 자라, 가정교사를 ‘가시가 돋쳤다’는 뜻의 ‘프릭스(Pricks)’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루이스 캐럴은 프리킷을 〈거울 속 여행〉에 나오는 붉은 여왕의 모델로 삼을 정도였다. 앨리스가 1932년에 회상한 내용에 따르면, 캐럴은 커다란 소파에 앉아서 연필이나 잉크로 그림을 쉴새 없이 그리며 이야기하고 세 자매는 양쪽에 앉아서 열심히 들었다. 늘 새로운 내용은 아니고, 옛이야기를 새롭게 바꾸거나 뒷부분을 이어갈 때도 잦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대목을 신선하게 추가해서 새 이야기처럼 들리곤 했다. 1862년 7월 4일, 캐럴은 트리니티 칼리지 특별연구원인 친구 로빈슨 덕워스와 함께 세 자매를 데리고 템스 강에서 보트를 탔다. 노를 저어 옥스퍼드에서 가즈토까지 올라가 강둑에서 식사하고 저녁 늦게 돌아왔는데, 친구가 쓴 일기에 따르면, 캐럴은 보트에서 [앨리스의 땅속 모험 Alice's Adventures Underground〉을 들려주고, 앨리스는 글로 써달라 부탁했다. 캐럴은 1887년에 회상하길,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내려고 머리를 짜내다, 여주인공을 토끼굴 땅속으로 무작정 내려보냈다. 뒷이야기를 어떻게 이어갈지 아무런 구상도 못 한 상태였다.” 그래서 앨리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그대로 적기도 하고, 전에 들려준 모험을 덧붙이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써나갔다. 어설프지만 독특한 삽화도 직접 그려 넣고, 나름대로 완성해서 앨리스에게 별생각 없이 주었다. 그런데 소설가 헨리 킹즐리는 학장 관저를 방문했다가 거실 탁자에 놓인 원고를 우연히 읽고서 출판을 제안했다. 캐럴은 얼떨떨한 마음에 훌륭한 동화작가며 친구인 조지 맥도널드와 의논했다. 맥도널드는 이것을 집으로 가져가서 자기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6세 아들 그레빌은 “6만 권짜리 이야기면 좋겠다”며 아쉬워했다.
결국, 캐럴은 원고를 출판용으로 개작해, 소풍에 대한 부분을 서두 시 형식으로 간단하게 줄이고 리델 자매에게 다른 시기에 이야기한 내용을 덧붙였다. 친구 덕워스가 제안해, 캐럴은 〈펀치 Punch〉지 만화가 존 테니얼을 소개받아 삽화를 부탁했다. 그래서 1865년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탄생했다. 초판은 인쇄가 나빠서 회수하는 바람에 21부만 남아 19세기의 희귀본이 되었다. 재판은 발행연도를 1866년이라고 적었으나, 실제로는 1865년 크리스마스 무렵에 출판했다. 이 책은 느리긴 해도 꾸준히 팔려나가더니, 루이스 캐럴이 사망할 무렵에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동화책이, 루이스 캐럴 탄생 100주년인 1932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책이 되었다. 앨리스 이야기가 성공한 비결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논리학과 수학을 다양하게 녹여내, 해석도 다양하지만, “수수께끼는 만들 때부터 해답이 없다”는 모자장수처럼 모두 어림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루이스 캐럴이라는 수수께끼’ 자체를 풀려는 시도는 수없이 많았다. 캐럴이 어린 여자애들과 친하게 지낸 건 이성에 대한 욕구를 대리 충족하려는 무의식적 행위였다든가, 애정을 쏟던 아이가 결혼 계획을 밝히면 질투 증세를 보였다든가, 앨리스 리델을 비롯한 몇몇 소녀와결혼까지 생각했다는 등, 주장은 다양하다. 그러나 입증할 증거는 거의 없다. 실제로 캐럴은 아이들이 크면, 앨리스 역시 12세가 된 다음부터, 더는 만나지 않았다. 리델 학장이 시도한 크라이스트 처치의 ‘개혁’을 캐럴이 풍자한 뒤로는 앨리스 동생 에디스조차 만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