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견우 지음 | 꿈공장플러스
이 글의 모든 시작은 한 소녀에게서 비롯된다. 바로 저자의 초등학교 5학년 짝꿍이다. 어린이날이 막 지난 5월의 어느 날 소년은 경상도에서 서울 변두리로 전학을 왔고, 소녀는 리라초등학교에서 선녀처럼 날아와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 서로 짝이 되었다. 소녀는 전교에서 그림을 가장 잘 그리는 뛰어난 꼬마 예술가이자 태권도 유단자로, 까불던 소년의 얼굴을 한주먹으로 내리친 인류 최초의 여성이다. 그게 미안했던지 소녀는 어느 순간인가부터 누나를 자처하며 엄마만큼 따듯한 보호자가 되었다. 소년은 1년쯤 지나 눈부시게 푸르던 어떤 날 불의의 사고처럼 다가온 그녀와의 이별을 맞으며 난생처음 느껴본 그 뭉클한 감정을 도무지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주변 어른들이 한국에서 가장 좋다던 고려대의 국문학과에 가서 반드시 시로 꽃피워보기로 결심했다.
소년은 그 이후로 한순간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었고 어느덧 소녀는 그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묘하게도 사춘기를 지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질풍노도의 반항심은 그녀의 오랜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전과 반란이라는 형태로 분출되었다.
소녀에 대한 사춘기적 반항은 소년의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게 된다. 이제 갇힌 새장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로 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말처럼 좋아하는 것을 더 즐기기 위해서는 싫은 것들을 빨리 경험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대학은 가장 싫어했던 연세대로, 전공은 문과생이 꺼리는 경제학을 선택했다. 직업 또한 이 기준을 벗어나지 않았음은 자명한 일이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지만, 소녀에 대한 그 시절 약속은 지울 수 없는 빚으로 남았다. 부담감을 떨치기 위해 그녀를 떠올리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춘천행 기차에 몸을 맡기고 연인들의 호숫가를 홀로 걸었다. 밸런타인데이에는 한강 유람선에 올라 카프리 맥주를 한 손에 들고 노을 진 석양을 바라보았다.
세월이 약처럼 흘러 한두 번의 어설픈 만남과 짝사랑을 거쳐 첫사랑을 하게 되었고, 대학 시절 내내 키스 한번 못 해봤지만, 각본 없는 독립영화 몇 편 분량의 외사랑과 이별 장면을 연출하였다. 첫 미팅 장소인 이대 앞 커피숍 가는 길 설렌 심장이 뛰고 식은땀은 쏟아져 도착 전에 이미 탈진이 되었고, 손이 떨려 물은 한잔도 마시지 못했다. 물망초 같은 여인을 떠나보내고 자정 넘은 막차의 창가에서 소리 없이 흐르는 남자의 눈물을 보았다.
그 시절 사연과 추억, 여기저기 떠돌던 마음속 흔적들이 책 속에 시와 학보 그리고 편지들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학창 시절 운명처럼 시작된 저자의 시인 흉내 내기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계속되었다. 매년 떠나는 여름 휴가처럼 때로는 무명가수 게릴라 콘서트처럼 징검다리 건너듯 그렇게 이어져 갔다. 직장 생활은 예상대로 순탄치 않았고, 예기치 않게 버라이어티하게 진행되었다. 첫 진급에서 대상자 중 유일하게 낙오되어 휴가를 내고 비 오는 분당 탄천 언저리를 뛰었다. 팔자에 없던 유학을 하고, 청와대를 비롯 이곳저곳을 떠돌며 낯선 이들과 인생의 희로애락을 맛보았다. 광고 기획이 딱 제 스타일인데 해외업무를 떠맡았으며, 혼자 놀기의 달인인데 조직생활을 20여 년째 이어오고 있다.
개인으로서의 시간은 짧고 방학도 안식년도 없는 직장인 브랜드로 대부분의 나날을 보내면서 주어진 일과 주변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민하며 때로는 성장하고 때로는 한없이 유치해지는 모순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저자는 커다란 조직 앞에 부모님과 친구, 애인에게서나 느낄 법한 감정들을 투영하며 이 건조한 무생물을 향해 응석 부리고 하소연하며 투덜거리는 처연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시집은 소년의 풋사랑으로 시작되었으나, 그것이 남자의 진부한 사랑 이야기인지 사내의 뻔한 인생 이야기인지 장담할 수 없다. 글은 이별과 그리움으로 시작되었으나, 삶에 대한 번민과 성찰을 거쳐 해학으로 마무리되었다. 저자의 소개처럼 정말 내일은 주인공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지금까지 보여준 것보다 앞으로 보여줄 것이 훨씬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