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권 지음 | 좋은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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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학 전공자로서, 있는 그대로의 미국을 알리고자 오랫동안 모색했다. 미국의 무엇을 어떻게? 그것이 관건이었는데, 미국은 문서와 토론으로 세워진 국가로서, 오늘날의 미국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문서를 올바로 번역하고 해설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 생각했다. 헌데, 번역자가 역량이 부족하거나 성심을 다 할 수 없거나 사심이 있다면 컨텐츠는 왜곡되거나 오도될 수 밖에 없다. 학부 시절부터 번역을 숙명처럼 해왔던 전직 프로 번역가로서, 저자는 오류 없고 사심 없는 번역이론을 정립하고 그 실천을 통하여 목표를 달성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한 작업을 ‘취미로 하는 번역’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다.
번역이 취미니까, 즉, 먹고 사는 일과 연관 짓지 않으니까, 시간과 보수에 구애 없이 완성도를 추구할 수가 있다. 그렇게 하여 성공한 프로젝트가 미국독립선언문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이었다. 국회의원이든 학자든 입만 열면 미국을 언급하는 대한민국의 풍토에서 미합중국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미국독립선언문의 완역에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번역 수준이다. 그리하여 그것도 모른 채 미국을 논하고 있었던 것이 대한민국의 미국에 대한 인식의 수준이다.
이같은 현상은 번역가들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출판의 여건과 구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장애를 깰 수 있는 방법이 저자에게는 바로 취미로서의 번역이었다. 좋은 번역의 비결은 숙성인데, 시간에 구애 없이 전문성과 완성도를 발현시킬 수 있는 번역. 그러려면 생계는 다른 수단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취미일 수밖에. 전문성을 의심받을 수 있는데, 이미 두 권의 전작 『이것이 미국독립선언문이다』와 『미합중국 건국의 아버지들』으로써 저자의 역량이 허당은 아니라는 사실은 검증된 바이다. 이번 『번역의 정석』은 도리어 저자가 수십년 경력의 번역계 고인 물들과 해당 학계를 향하여 그간의 실적을 비판하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번역을 이념투쟁의 일환으로 실천하는 번역가들이 있다. 사심 가득한 번역이라고 보았다. 자신이 신봉하는 그 이념에 맞는 서적을 찾아서 왜곡 없이 번역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는데, 엉뚱한 내용을 가지고 자신의 사심을 채우기 위하여 텍스트를 왜곡하면서 쾌감을 누리는 부류다. 이념투쟁을 하려면 나가서 돌이나 화염병을 던질 일이지, 번역을 하고 앉았다니, 투쟁의 가성비도 없을뿐더러 본인의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무엇보다도 번역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사회적 해악이 아닐 수 없다.
번역은 지식 산업의 생태계에서 일종의 ‘노가다’라는 비하적 인식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원저자의 머리꼭대기에 앉아서 원저자의 오류도 발견하여 지적해야 하는 중책임에도 불구하고 번역가의 등용과 검증, 그리고 처우에 이르기까지 열악한 환경이다 보니 나타나는 구조적 현상이 아닌가 싶다.
『번역의 정석』은 이와 같은 모든 문제를 직시하며, 그 솔루션을 실천한 작은 성과이다. 한국은 모든 분야에서 입만 열면 미국을 언급하며 미국을 준거의 모델로 삼는 경향이 있지만 그런 의식적 · 감성적 의존도에 비하여 미국을 잘 모른다. 미국에 대한 맹목적 감정들만 난무할 뿐, 피상적이고 부분적이고 편파적인 관점만으로 판단하려 할 뿐, 인식과 현실 사이에 간극이 너무 크다. 그 간극을 메꿔줄 방법이 바로 번역이다. 생계와 사심에서 벗어난, 전문적이고 완성도 있는 번역, 그것이 바로 번역의 정석이다.
지난 수년간 먹고 사는 와중에 틈틈이 필요하다 싶은 번역을 수행하면서, 또 그 와중에작업 중인 텍스트에 대한 그리고 번역이란 작업 자체에 대한 에세이를 짬짬이 썼다. 어느날 문득 그것들을 모아 보니 책이 됐네? 번역과 창작은 둘이 아니더라. 이 책에서 다루었던 텍스트에 대한 대략 그런 정도의 이해와 열정으로 만든 책이 바로 『번역의 정석』이다.
번역의 정석을 표방하며 번역이론에 많은 할애를 했지만 이 책의 목적은 있는 그대로의 미국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번역이론서가 아니라 미국학으로 분류되기를 바라는 서적이다. 있는 그대로의 미국을 전달하 보니 있는 그대로의 번역을 위한 이론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을 뿐 이론을 위한 이론은 아니라는 사실. 다만 이 책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의 번역에 뜻을 세우고, 있는 그대로의 미국 속으로 탐험해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 그게 바로 『번역의 정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