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향 지음 | 아모르문디
“빈센트 반 고흐가 현대 뉴욕에 살았다면,
아마도 감자를 먹는 사람들 대신
피자를 먹는 사람들을 그렸을 것이다.
도시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파편들이
속도를 높이며 명멸하는 법이다.
공간 위에 공간이 있고 빛 위에 빛이 있으며
사람 위에 사람이 있고
시간이 쌓였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뉴욕, 그곳의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에게 바치는 기억의 오마주
『뉴욕, 에스노그래피 1995~2019』는 다큐멘터리를 공부하러 뉴욕에 온 저자가 1995년부터 2019년까지 그곳에서 보낸 시간의 기록이다. 그의 말처럼 이 기억의 ‘에스노그래피’는 사적인 기록이지만, 그 자체로 작은 역사를 이룬다. 저자가 거닐고 일하고 잠을 청하는 건물과 거리, 뉴욕을 이루는 수많은 공간에는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를 품은 사람들이 살고 또 떠돈다. 그 속에서 그는 낙천적인 홈리스를, 끊임없이 직업을 구하는 젊은 여자를, 묘지를 떠도는 여행자를, 가난한 사진작가를, 유명한 영화음악가를, 홀로 늙어가는 할머니를,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만난다.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하고 시간을 함께 보내며, 저자는 뉴욕의 구석구석에 힘겹게 깃을 치고 사는 이들을 무한한 애정으로 마주한다. 그리고 그 역시 자연스럽게 뉴욕의 한 부분이 된다.
로어 이스트사이드, 이스트빌리지, 다운타운브로드웨이와 웨스트 4가, 세인트막스 플레이스와 유니온 스퀘어, 그리니치빌리지와 첼시, 린브룩, 서니사이드 우드사이드, 아즐리 온 허드슨, 미드타운, 어퍼 이스트사이드-할렘, 그래머시, 브루클린 거리와 코니아일랜드, 브라이튼 비치로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는 여러 시간과 공간이 혼재한다. 그리고 저자는 바로 그 시간, 그곳을 담은 혹은 연상시키는 영화와 음악, 또는 시와 소설을 이야기함으로써 개인의 역사와 예술의 연대기를 함께 기록한다. 조곤조곤 읊조리듯 이어지는 섬세한 문장 속에는 특유의 멜랑콜리가 깃들어 있고, 독자들은 저자의 시선으로 함께 뉴욕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영화와 사진, 음악과 문학 속을 유영하기
이 책은 25년간 뉴욕에서 보낸 저자의 삶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에 관한 기록인 동시에, 한 다큐멘터리 작가의 예술 에세이이기도 하다. 이 거리와 저 모퉁이, 지금과 과거의 언젠가를 끊임없이 오가는 여정 속에는 어김없이 누군가의 영화가, 음악이, 소설과 시가 등장한다. 로어 이스트사이드에 살면서는 톰 웨이츠의 노래 속 “이스트 오브 이스트 세인트루이스”에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어느 밤과 영화 〈헤드윅〉의 노래에 등장하는 “정션 시티”를 떠올리고, 서니사이드 우드사이드에서는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 속 암흑을 생각한다.
이렇게 꼬리를 물고 끝나지 않을 듯 이어지는 예술, 예술가들의 이야기야말로 뉴욕을 다룬 여느 에세이들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그 가운데에는 대중적인 작가와 작품들도 있지만, (특히 영화를) 매우 즐기거나 깊게 공부하지 않았다면 생소할 이름들도 꽤 많다. 그 이름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덤’이다.
또한 저자가 필름 카메라로 직접 찍은 사진들은 몽환적이고 예술적인 느낌을 더한다. 저자가 뉴욕에서 머물렀던 공간의 순서에 따라 이어지는 각 챕터 사이사이에는 막간과 같은 짧은 글을 넣어 휴지(休止)의 시간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