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뉴베리상 대상 수상작!
한국계 작가 태 켈러, 아동문학의 노벨상 ‘뉴베리상’ 수상!
「해님 달님」, 마법 호랑이, 강인한 한국 여성들의 이야기
“할머니, 이야기 하나 해 주세요.”
할머니는 웃음을 머금고 깊은 숨을 한 번 쉰 다음,
한국식 “옛날 옛날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날에, 호랑이가 사람처럼 걷던 시절에……”
‘조아여’(조용한 아시아 여자애) 릴리,
병든 할머니를 위해 ‘마법 호랑이’와 대결하다!
한국계 여성 작가 태 켈러(27)가 쓴 2021년 뉴베리상 대상 수상작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원제: When You Trap a Tiger, 2020)이 돌베개에서 출간되었다. 이미 한국에도 출간된 데뷔작 『깨지기 쉬운 것들의 과학』이 그랬듯, 태 켈러는 이번에도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모험에 뛰어드는 한국계 미국 소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릴리네 가족은 병에 걸린 외할머니를 돌보기 위해 캘리포니아에서 워싱턴주로 이사한다. 어느 날, 할머니의 「해님 달님」 이야기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호랑이가 릴리 앞에 나타나 솔깃한 제안을 한다. 옛날 옛날에 네 할머니가 훔쳐 간 것을 돌려주면 할머니를 낫게 해 주마. 릴리는 온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한다.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나 호랑이가 사람의 소원을 순순히 들어줄 리가!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은 자신을 ‘투명 인간’이라고 정의하고, 언니로부터는 ‘조아여’(조용한 아시아 여자애)라고 불리는 릴리가 ‘마법 호랑이’와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를 하는 과정 속에서, 마음 깊숙이 숨겨 둔 고통과 슬픔, 분노와 욕망, 드러내기 힘든 진실과 마주할 용기를 깨닫는 이야기다. 한편으로는 이야기의 힘, 가족의 마법, 자아 정체성 탐구, 강인한 한국 여성들에 관해 말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복합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할머니와 릴리를 집요하게 뒤쫓는 통제 불가능하고 무서운 존재이면서, 한편으로는 할머니와 릴리가 고통으로부터 스스로 걸어 나오도록 부추기는 구원자이며, 궁극적으로는 ‘조용하고 완벽한 여자아이’라는 껍질 속에 감춰진 ‘자유롭고 해방된 존재’, ‘분노와 욕망을 지니고 있고 표출할 줄 아는 존재’, 나아가 할머니와 릴리가 외면해 왔던 본연의 자기 자신을 상징한다. 이처럼 적대자인 줄로만 알았던 호랑이가 차차 조력자로 밝혀지고, 릴리 안에 잠들어 있던 ‘호랑이 소녀’가 서서히 깨어나는 서사가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세계 속에서 극적으로 펼쳐진다.
이야기 후반부에서 친구 리키는 릴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린 아주 많은 모험을 할 거야, 초능력 호랑이 소녀.” 내면에 잠들어 있던 호랑이를 깨워서 끌어안은 순간, 릴리는 더 이상 투명 인간도, 조아여도, 손이 덜 가는 착한 아이도 아니다. ‘초능력 호랑이 소녀’다. 이제 릴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속에 꽁꽁 가둬 두지 않을 것이다. 릴리 앞에는 더 다양하고 더 많은 이야기로 가득 찬 새롭고 거대한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그 흥미진진한 세계에서 자유롭게 모험을 즐기라고, 저자는 어린 독자들에게 속삭인다.
저자 태 켈러는 1998년 아메리카 북어워드 수상작 『종군위안부』의 작가 노라 옥자 켈러의 딸이다. ‘태’(Tae)라는 이름은 한국에서 이민 온 외할머니의 이름 ‘태임’에서 첫 글자를 따 지었다. 현지에서는 ‘테이’에 가깝게 발음되지만, 저자의 확인을 거쳐 ‘태 켈러’로 표기했다. ‘저자의 말’에서 태 켈러는 자신을 “4분의 1만 한국인”이라고 설명하기를 그만두고 “완전한 내가 되고 싶어서” 어릴 적 외할머니에게 들었던 옛이야기들을 다시 찾았다고 말한다. 그 결실이 바로 이 책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이다.
§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때만큼은 나는 부분적인 백인도, 부분적인 아시아인도, 4분의 1 한국인도, 혼혈도 아니었다. 그저 완전한 나였다. 뼛속에서부터 그것을 느꼈다.
수년이 흘러 대학을 가기 위해 하와이를 떠나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이야기들을 버렸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그저 어쩌다 보니, 마치 그 이야기들이 내 침대 밑으로 굴러 들어가 먼만 쌓이게 되듯 그렇게 되었다. 머지않아 나는 그 이야기들이 내 삶에서 사라졌다는 사실마저 잊었다.
그러다 내게 그 이야기들이 무척이나 필요함을 깨닫게 된 것은 대학 재학 기간 후반, 누군가가 내게 한국인이냐고 물었을 때였다.
“4분의 1만 한국인”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하자마자 잘못된 대답이라 느꼈다. 한국인이냐는 질문에는 언제나, 퍽 단순하게도, 그렇다고 하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내 피를 부분 부분으로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나뉘지 않은 완전한 내가 되고 싶어서, 나는 다시 그 이야기들을 찾았다.
_본문 325~326쪽(저자의 말)
상세이미지
저자 소개
저자 : 태 켈러
호놀룰루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보라색 잡곡밥과 스팸 무스비를 먹고 할머니(halmoni)의 호랑이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랐다. 『깨지기 쉬운 것들의 과학』을 썼고,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으로 뉴베리상을 탔다. 시애틀에서 살고 있다. ‘태’(Tae)라는 이름은 할머니의 이름 ‘태임’에서 첫 글자를 따 지었다. 매월 발행하는 태 켈러의 영문 러브레터를 받으려면 이 주소로 가면 된다.
역자 : 강나은
영미권의 좋은 책을 한국에 소개하는 일에도 열의를 품은 번역가. 사람들의 수만큼, 아니, 셀 수 없을 만큼이나 다양한 정답들 가운데 또 하나의 고유한 생각과 이야기를, 노래를 매번 기쁘게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소개하고 옮긴 책으로 『깨지기 쉬운 것들의 과학』 『나의 고래를 위한 노래』 『소녀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나의 목소리가 들려』 『번개 소녀의 계산 실수』 『내 조각 이어 붙이기』 『블랙홀 돌보기』 『슈팅 더 문』 『나무 위의 물고기』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발칙한 예술가들』 『툴루즈 로트레크의 파리』 『루이스 헤이의 나를 치유하는 생각』(공역) 등이 있다.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 「간지들의 하루」 「잔인한 나의, 홈」의 자막을 영어로 옮겼다.
목 차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9
저자의 말 325
감사의 말 331
출판사 서평
■ 한국계 작가 태 켈러, 제100회 뉴베리상 수상
지난 1월 21일, 미국어린이도서관협회(ALSC; Association for Library Service to Children)는 한국계 여성 작가 태 켈러의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을 2021년 제100회 뉴베리상 수상작으로 발표했다. 뉴베리상은 안데르센상,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과 함께 ‘아동문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최고의 상으로, 해마다 한 작품을 선정해 뉴베리 메달을 수여하고 최종 후보 서너 편을 ‘아너 리스트’(honor list)로 발표한다. 2021년 뉴베리상 수상작은 태 켈러의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한 작품이며, 여느 해보다 많은 다섯 편이 아너 리스트에 올랐다.
1922년 첫 수상자가 나온 이래 100번째 뉴베리 메달의 주인공이 된 태 켈러는 현재 스물일곱 살로 이번 수상작이 두 번째 책이다. 이토록 젊은 신진 작가에게 뉴베리 메달을 안기면서, 미국어린이도서관협회는 이렇게 평했다. “한국 민담에 생명을 불어넣은 마술적 리얼리즘의 걸작으로, 사랑과 상실과 희망을 환기시킨다. 할머니(halmoni)의 옛이야기를 통해 릴리는, 이야기가 있기에 과거를 공유하고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울러 뉴베리상 위원회 위원장 존다 C. 맥네어는 “이야기의 힘에 관한 매혹적인 동화로, 필요한 순간에 솟아나는 힘과 용기를 보여 줌으로써 독자들이 자기 안의 호랑이를 포용할 수 있게 도와준다.”라고 평했다.
■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질주하는 소녀의 모험담
태 켈러의 데뷔작 『깨지기 쉬운 것들의 과학』에는 우울증으로 칩거 중인 식물학자 엄마를 원래대로 되돌리려고 분투하는 한국계 소녀 내털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내털리는 엄마가 연구했던 희귀식물 ‘코발트블루 난초’를 구하러 갈 비행기표를 사기 위해 ‘달걀 깨뜨리지 않고 떨어뜨리기’ 대회에 참가하고, 엄마의 옛 직장이었던 연구실에 잠입한다. 모험이 끝난 뒤 내털리는 ‘깨지기 쉬운 삶이라도 멈추지 않으면 괜찮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역시 ‘사랑하는 가족 구하기’라는 테마에서 출발한다. 릴리는 병든 할머니를 위해 ‘마법 호랑이’의 수상한 거래를 받아들인다. 호랑이에 따르면, 옛날 옛날에 릴리의 할머니가 호랑이들에게서 무언가를 훔쳐 갔다. 그리고 그 물건을 찾아서 호랑이들에게 돌려주면 할머니 병이 나을 수 있다. 릴리는 할머니가 훔친 것을 찾아내기 위해 질주한다. 한편으로는 할머니를 뒤쫓는 호랑이를 잡아들일 방법을 궁리한다.
이렇듯 태 켈러의 두 주인공은 조용하고 반듯하면서 강직한 내면을 가진 한국계 소녀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저자의 유년기를 슬며시 상상해 보게 만드는 이 소녀들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더욱 친숙하게 다가서고 더 큰 공감을 안겨 줄 것이다.
■ 잠들어 있던 ‘호랑이 소녀’가 깨어나다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은 착한 아이가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이야기로 출발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주인공 릴리가 내면에 잠들어 있던 본연의 존재 ‘호랑이 소녀’를 자각하는 이야기로 발전한다.
‘호랑이 소녀’란 릴리가 어릴 때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해님 달님」 이야기에서 태동하고 발전한 ‘새로운 해님 달님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호랑이 소녀’ 이야기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 형식으로 전개된다. ‘마법 호랑이’가 릴리에게 들려주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릴리가 뒤를 이어받아 병상의 할머니에게 들려주면서 마무리된다.
‘호랑이 소녀’는 낮에는 인간이다가 밤에는 호랑이로 변한다. 호랑이는 거칠고, 통제할 수 없고, 진실을 말하고, 세상을 집어삼키고, 언제나 더 원한다. 반면에 인간 여자아이는 원해서는 안 되고, 남을 도와야 하고, 조용해야 한다고 배웠다. ‘호랑이 소녀’는 인간 여자아이치고는 너무 많은 감정을 느끼고 호랑이치곤 너무 많은 두려움을 느끼는 “두 갈래 삶” 속에서 고통받다가 어린 딸을 지상에 남겨 둔 채 하늘로 올라간다.
여기서 반인반수의 존재인 ‘호랑이 소녀’는 “4분의 1만 한국인”이라고 자신을 설명해야 했던 저자 자신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분노와 욕망과 자기주을 감춘 채 조용하고 착하게 순응하면서 살기를 강요받는 존재, 즉 여성들과 아이들, 특히 소녀들을 상징한다.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던 모험 속에서 릴리가 깨닫는 것은 자기 안에 존재하는 ‘호랑이 소녀’다. 릴리는 조용한 아시아 여자애, 투명 인간, 손이 안 가는 착한 아이라는 껍데기를 스스로 깨뜨리고 나온다. 이제 릴리는 분노할 일에는 분노하고, 자기주장을 똑똑히 할 수 있다.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아빠 얘기를 언니 샘과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것처럼 완벽하게 만들지 못한 떡도 충분히 맛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번 작품이 흥미로운 점은 릴리가 소중한 것을 스스로 깨뜨림으로써 진일보한다는 사실이다. 깨지기 쉬운 것들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아이는 스스로 깨뜨리는 쪽을 선택하면서, 자유롭고 해방된 존재,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 나는 초록색 유리 단지를 집어 던지고, 벽에 부딪힌 그 병은 폭발한다.
언니가 비명을 지른다.
“뭐 하는 거야?”
그런데 말이다, 깨뜨리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냥, 도저히 다 견딜 수가 없다. 그 모든 희망과 두려움과 강인함과 힘. 그 모든 이야기와 대가와 불확실함. 내 안에 넣고 꽉 닫아 두기에는 너무 많다.
이번에는 길고 가느다란 단지를 집어 들어 벽에다 던진다. 그것이 깨어지는 걸 후련한 기분으로 바라본다.
_본문 282쪽
■ ‘이야기의 힘’에 관한 이야기: “어떤 이야기는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
오래전 한국에 살 때 릴리의 할머니가 호랑이들에게서 훔친 것은 물건이 아니라 ‘이야기’다.
§ “나는 조그만 마을 사는 조그만 여자애여도 꾀 많았어. 호랑이 동굴 밖에 몰래 숨어서 호랑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어. 호랑이들 코 고는 소리에 땅 흔들릴 때까지. 그리고 내가 그 별들, 그 나쁜 이야기들을 주먹으로 쥐어서 유리 단지 안에 넣었어. (…)
내가 그 유리 단지들 꽉 잠갔어. 그리고 살금살금, 가만가만, 조용조용 동굴 떠났어. 그런데 이런 생각 들었어. ‘더 조심해야 돼. 호랑이들이 절대 못 쫓아오게 해야 돼.’ 그래서 숲속에서 바위를 하나씩 가지고 와서 동굴 입구에 쌓았어. 벽 만들었어, 크고 무거운 벽. 호랑이들이 그 벽 안에 갇혔어. (…)
나는 ‘나쁜 이야기 이제 싫어. 더는 싫어. 다시는 안 들어.’ 하고 생각했어. 그래서 달아났어. 나 살던 작은 마을 떠났어. 바다 건너고 온 세상 건너서, 새로운 곳에 갔어. 슬픔이 못 쫓아오는 곳에 갔어.”
_본문 63~64쪽
릴리의 할머니는 한국에서 겪었던 일을 딸에게조차 말하지 못한다. 할머니의 과거에 관한 정보라고 해 봤자, 김해에서 자신의 할머니(릴리의 고조할머니)와 단둘이 살았고, 미국으로 떠난 엄마(릴리의 증조할머니)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왔고, 결국 엄마를 만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전부다.
할머니는 고통스러운 과거, 즉 ‘나쁜 이야기’를 호랑이들에게서 훔친 뒤 오랫동안 단지 속에 꽁꽁 숨겨 놓고 있다. 어느 날 릴리 앞에 나타난 ‘마법 호랑이’가 그 이야기를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네 할머니가 가둬 둔 이야기를 릴리 네가 풀어 주면 할머니는 나아질 거야. 그 별들이 계속 갇혀 있으면 할머니가 아프고 말이야. 그 별들이 네 할머니를…… 집어삼킬 거야.”
릴리는 할머니가 숨겨 둔 단지 속에 갇혀 있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는다. 그것이 바로 ‘호랑이 소녀’ 이야기다. 릴리와 ‘마법 호랑이’가 주거니 받거니 완성하는 ‘호랑이 소녀’ 이야기에는 할머니뿐만 아니라 릴리와 언니 샘도 ‘해님 달님 자매’로 등장한다. 가둬 둔 이야기가 풀려나는 순간, 할머니는 평화롭게 눈을 감고 릴리와 샘은 자신들 앞에 새롭고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감지한다.
이처럼 이 책은 ‘이야기의 힘’에 관해 말한다. “진실을 이야기하는 데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아주 오래 숨겨졌던 진실”일수록 더더욱 아프고 “예상 못 한 합병증”을 일으킨다. 그러나 진실은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 진실을 풀어놓을 때에만 비로소 해방된 존재로 세상과 만날 수 있다고이 책은 말한다.
§ “그래도요 할머니, 슬픈 이야기를 숨기는 건 안 좋은지도 몰라요.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일들이 일어나지 않은 게 되는 건 아니니까요. 숨긴다고 해서 과거가 지워지는 것도 아니에요. 갇혀 있는 것뿐이지.”
_본문 275쪽
§ 자매는 두려웠지만 동시에 용감하기도 했어요. 희망을 믿었어요. 그래서 그 단지들과 이야기들을 열었어요. 어떤 이야기들은 무서웠고, 어떤 이야기들은 슬펐지만 두 여자아이는 자랑스럽다고 느꼈어요. 제 가족의 이야기였으니까요. 자기 심장을 지키려 싸운 수많은 세대, 수많은 여자들의 이야기였으니까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여자들의 이야기였으니까요.
그러고는 마치 거친 실로 짠 천처럼 귓속을 긁는 목소리로 하늘 호랑이가 말했어요.
“이제 너희들 이야기를 해 봐. 빛은 무한해.”
그래서 자매는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
그렇게 하늘을 이야기 별로 채웠어요. 두 자매 덕분에 세상이 밝아졌어요.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둘은 집을 찾아갈 수 있었어요.
그 빛 속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_본문 311~312쪽
■ ‘호랑이 소녀’ 5대, 강인한 한국 여성들의 이야기
태 켈러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태 켈러의 러브레터’에서 이렇게 말한다.
§ 이 이야기는 몇 년 전, 여동생과 내가 할머니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조르던 때 처음 생겨났습니다. 김치 담그기는 정말 오래 걸린답니다. 그때 우리는 기다림을 이야기로 채웠지요. (…)
나는 분투와 고통만이 아니라 내가 물려받은 전통과 가족의 힘, 마법, 기쁨이 돋보이는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역사가 숨겨야 할 무엇이 아니며 나의 뿌리, 내가 당신에게 속해 있음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할머니에게 전할 방법을 찾아야 했지요.
마침내, 나는 적당한 말을 찾았습니다.
_저자 홈페이지 중 ‘태 켈러의 러브레터’ 2020년 1월 29일자
‘저자의 말’에서 테 켈러는 이 책이 자신의 뿌리인 한국과 연결되어 있으며, 어릴 적 자신과 여동생 선희에게 할머니가 들려주던 「해님 달님」 이야기에서 싹텄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판권 면에 명기되어 있듯이 “여기에 나오는 이름, 인물, 장소, 사건 들은 저자가 상상으로 지어낸 것이거나 소설적으로 사용한 것”이며, “생존해 있거나 사망한 실제 사람, 또는 실제 사건, 장소와 닮은 점이 있다 해도 완전히 우연”이다. 그러므로 릴리네 가족의 이야기가 태 켈러의 가족사와 얼마나 일치하고 얼마나 다른지 굳이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태 켈러가 릴리네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식민 지배와 전쟁과 가난 속에서 용감하게 삶을 헤쳐 나간 한국 여성들과 그 딸들에 관해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강인한 한국 여성들의 이야기’이면서 ‘호랑이 소녀’ 5대의 연대기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에서 홀로 손녀를 키우며 살았던 릴리의 고조할머니부터, 어린 딸을 남겨 두고 미국으로 떠나야 했던 릴리의 증조할머니, 엄마를 찾아 미국으로 떠나온 뒤 고통스러운 과거를 잊으려고 애쓰면서도 용감히 삶을 개척하며 지역 공동체의 소중한 존재로 자리 잡은 릴리의 할머니, 영어가 서툰 엄마의 소통 창구 역할을 하며 성장했고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은 뒤 두 딸을 돌보며 살고 있고 이제는 병든 엄마의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일자리를 구하러 나서는 릴리의 엄마, 그리고 조용한 아시아 여자애 릴리와 반항적인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언니 샘까지, 모두 다 강인하고 용맹한 ‘호랑이 소녀’의 후예다.
§ 나는 노력했다. 우리 가족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를 파고들었다.
나는 식민 지배와 핍박에 관해, 숨겨진 언어와 잊힌 이야기들에 관해, 일본군 ‘위안부’와 강요된 침묵에 관하여 읽었다. 하지만 그 어두운 역사 속에서 나는 강인함을 발견했다. 한국인은, 특히 한국 여성은 맹렬하고 쉬이 스러지지 않는 사람들이었으며, 그 역사를 배워 가면서 나는 할머니와 나 자신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_본문 327쪽저자의 말)
■ 서로 다르지만 저마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
태 켈러는 이 책에서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안고 살아가지만 모두 다 소중한 사람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보여 준다. 늘 진지하지만 어린 방문객들을 위해 빵을 직접 굽는 도서관 사서 조, 시끄럽고 엉뚱하지만 집 나간 엄마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리키, 도서관에서 사서 보조로 일하면서 학습이 부진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씩씩하고 친절한 여자 고등학생 젠슨, 그런 젠슨과 다정한 동성 커플로 어느새 발전한 반항아 샘…….
릴리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도서관 바자회 겸 릴리네 할머니를 추모하는 자리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마을 체계에 충격”을 준 이질적인 존재이면서도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았던 릴리네 할머니를 추모하면서 다 함께 빵과 떡을 나눠 먹는 장면으로 이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서로 다른 이야기, 때로 이해하기 힘들고 때로 본류를 벗어나 제멋대로 흘러가는 듯도 보이는 이야기들이 한데 어우러져 환하게 빛난다.
§ “나는 질서를 좋아해. 정리를 좋아하고. 세상 모든 정보가 정리되어 있고 제자리에 있다는 걸 생각하면 참 좋아.”
조는 목을 가다듬는다.
“그런데 내가 도서관 일을 아주 오랫동안 했거든. 그러면서 배운 거 하나는, 이야기에선 질서와 정리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 감정이 중요하지. 그리고 감정이 늘 이해가 되는 건 아니거든. 그러니까, 이야기란…… (…)
……물 같아. 비 같고. 이야기는 우리가 꽉 잡아 보려 해도 언제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거든. (…)
그게 무서울 수도 있지. 그래도 생각해 보면 물은 우리한테 생명을 주거든. 물이 대륙을 연결하지. 사람도 연결하고. 그리고 물이 가만 멈춰 있는 조용한 순간들이면 우리 스스로를 비춰 볼 수도 있고. 무슨 말인지 이해되니?”
_본문 235~2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