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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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평전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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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74431556
쪽수 : 340쪽
김삼웅  |  빛두레  |  2023년 0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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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 국내도서 > 역사/문화 > 한국사 > 한국역사인물 국내도서 >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역사인물 국내도서 > 역사/문화 > 역사인물 > 한국역사인물 ‘다산(茶山)’ 하면 야트막한 차밭이 떠오른다. 그러나 ‘다산’ 뒤에 고유명사 ‘정약용(丁若鏞)’이 붙으면 차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곳에 거대한 학문의 산맥과 도무지 그 넓이와 깊이를 헤아리기조차 힘든 사상의 바다가 펼쳐진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개혁사상가, 저술가,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조선의 엔지니어, 서학 사상의 개척자, 혁명을 꿈꾼 시인, 그리고 뛰어난 법학자이자 의학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산의 ‘학문의 산맥과 사상의 바다’는 얼마나 높고 깊고 넓을까? 우리는 왜 다산에 열광하고, 그의 삶과 사상을 배우고 따르고 싶어 하는가? 수많은 모습 중 다산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저자 소개
저자 : 김삼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지금의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회 위원, 3·1운동·임시정부수립100주년기념사업회 위원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통일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 등 이 분야의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주요 저서로 『한국필화사』, 『백범 김구 평전』, 『을사늑약 1905 그 끝나지 않은 백년』, 『단재 신채호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안중근 평전』, 『김대중 평전』, 『안창호 평전』,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 『김근태 평전』, 『10대와 통하는 독립운동가 이야기』, 『몽양 여운형 평전』, 『우사 김규식 평전』, 『위당 정인보 평전』, 『보재 이상설 평전』, 『의암 손병희 평전』, 『조소앙 평전』, 『백암 박은식 평전』, 『나는 박열이다』, 『박정희 평전』, 『신영복 평전』, 『현민 유진오 평전』, 『외솔 최현배 평전』, 『3·1 혁명과 임시정부』, 『장일순 평전』, 『의열단, 항일의 불꽃』, 『수운 최제우 평전』, 『꺼지지 않는 오월의 불꽃: 5·18 광주혈사』, 『운암 김성숙』, 『나철 평전』, 『정의의 길, 역사의 길』, 『광이불요의 지도자: 성재 이시영 선생 평전』, 『개남, 새 세상을 열다』, 『이승만 평전』, 『김재규 장군 평전』, 『우당 이회영 평전』, 『겨레의 노래 아리랑』(근간) 등이 있다.
목 차
책머리에 5 / 캄캄한 시대에 뜬 별 25 / 호학군주 정조 즉위로 출셋길 열려 39 / 영예와 굴곡진 행로 59 / 촉망받는 인재로 성장 89 / 밀려오는 먹구름 117 / 폐족의 위기 속에서 133 / 고난의 길, 역사의 길 151 / 후세에 남을 저술에 매진 173 / 다산초당에 몸을 맡기고 187 / 다산초당 시절 201 / 민족사의 명저들을 집필하며 227 / 정약전, 그리고 다산과 제자들 251 / 저술에 열정 쏟으며 263 / 귀향, 새로운 시작 273 / 역사적인 쟁점들 289 / 다양한 활동과 의외의 행적 303 / 조선의 큰 별이 지다 313 / 마무리하며 325 / 주(註) 330
출판사 서평
지식인의 모범이자 위대한 사상가, 혁명을 꿈꾸던 시인, 정약용 우리는 왜 다산 정약용에 열광하고, ‘다산(茶山)’에 오르려 할까? 평전의 대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들려주는 다산의 파란만장한 삶! ‘다산(茶山)’ 하면 야트막한 차밭이 떠오른다. 그러나 ‘다산’ 뒤에 고유명사 ‘정약용(丁若鏞)’이 붙으면 차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곳에 거대한 학문의 산맥과 도무지 그 넓이와 깊이를 헤아리기조차 힘든 사상의 바다가 펼쳐진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개혁사상가, 저술가,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조선의 엔지니어, 서학 사상의 개척자, 혁명을 꿈꾼 시인, 그리고 뛰어난 법학자이자 의학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산의 ‘학문의 산맥과 사상의 바다’는 얼마나 높고 깊고 넓을까? 우리는 왜 다산에 열광하고, 그의 삶과 사상을 배우고 따르고 싶어 하는가? 수많은 모습 중 다산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다산은 타고난 천재에다 금수저 가문에서 태어나 훌륭한 문중의 아내를 만나고 왕의 총애까지 받으며 삶의 절반가량은 큰 굴곡 없이 평탄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총애하던 정조와 지기들이 죽은 뒤, 나이 마흔이 넘어서면서부터 당파싸움과 천주교 박해의 희생양이 되어 그 누구보다 불행하고 고달픈 삶을 보내게 된다. 지금까지 50여 종의 평전을 출간한 인물 평전의 대가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오랫동안 준비하고 생애 마지막에 오르고 싶었던 산, ‘다산(茶山)’의 파란만장한 삶을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통합적인 지성을 원한다면 ‘다산(茶山)’에 오르기를 추천합니다. 조선 후기 퇴락한 주자학의 저수지 변두리에서 분출했던 실학, 실학의 중심부에서 솟구친 ‘다산학’은 암울했던 그 시대인이 후대에 물려준 학문과 개혁의 경전입니다. 조선 후기 전봉준과 김개남 등은 그 맥의 한 가닥을 해독하고 동학혁명의 기치를 들었지요. ‘다산’에 만학이 들어 있고, 애민정신과 진정한 정의와 공정의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지은이 김삼웅). 누구나 인생에서 꼭 오르고 싶어 하는 산, 다산(茶山)! 독립운동사와 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지금까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주요 인물의 평전을 50여 종 출간한 인물 평전의 대가이다. 김구, 안중근, 안창호, 조소앙, 이상설, 이회영, 홍범도, 최제우, 김규식, 손병희, 최시형, 박은식, 이승만, 박정희, 김재규, 김대중, 노무현, 김영삼, 장일순, 신영복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주요 인물은 그의 손을 거쳐 다시 태어나지 않은 인물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 그가 젊은 시절부터 생애 마지막에 꼭 다루고 싶은 인물이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었다. 언젠가 ‘다산(茶山)’이라는 큰 산에 오르기 위해 틈틈이 자료를 찾아 모으고 읽었다. 그렇게 모은 책이 130여 종이고, 논문까지 합치면 200종이 넘는다고 한다. 1975년에는 정인보와 안재홍이 교열한 금속활자본 『여유당전서』를 당시 몇 달 치 월급에 해당하는 거액을 주고 사들이기도 했다. 정약용은 우리나라 사람 중 존경하는 인물을 꼽을 때 이순신과 세종대왕과 더불어 늘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다산이 남긴 유산에 관한 연구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다산의 평전과 전기, 다산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의 책들도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 그런데도 또 하나의 다산 평전을 더하는 이유는 저자 나름의 의문점을 중심으로 다산의 삶과 사상을 정리하기 위해서이다. 다산의 굴곡 많은 삶에 초점을 맞추어 개인사와 역사적 상황을 잘 엮고, 다산의 사상에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내용을 담아서 담담하게 들려준다. 다산의 뜻밖의 활동과 행적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들려준다. ‘다산’이라는 ‘태산’에 누구라도 쉽게 올라 정약용의 파란만장한 삶을 함께 느껴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지식인의 지표, 그리고 아홉 가지 의문 ‘전인적 지성, 통합적 지성’의 대표적인 인물인 다산은 우리 시대 지식인들의 영원한 지표이자 사표이다. 그러나 다산 역시 완벽한 성인은 아니다. 이 책은 기존의 다산 전기와 평전에서 잘 다루지 않는 것들, 즉 저자가 생각하는 아홉 가지 의문점에 관심을 갖고 다산이라는 거목의 삶과 사상에 접근한다. 다산의 인간적 취약점을 포함한 아홉 가지 의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조 시대에는 정조라는 개혁 군주와 훌륭한 신하들이 많았는데, 왜 정조의 죽음으로 개혁정치가 무너지고, 하루아침에 다시 수구세력에 권력이 넘어가는가? 둘째, 조선 사회가 두 차례 호란을 겪은 뒤 극심했던 ‘북벌론’에서 ‘북학론’으로 어젠다가 바뀌고, 이런 과정에서 ‘성호 이익의 중농학파→연암 박지원의 이용후생파→다산 정약용의 경세치용파’로 이어지면서도 이들 실학파가 정치세력의 중심이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셋째, 다산은 “조선인으로서 조선 시”를 지어야 한다고 누누이 역설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500여 권의 저술 중 시 한 편도 한글로 짓지 않았는데, 그 배경은 무엇인가? 또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에 적극 호응하고 더욱 강경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한 것은 왜인가? 넷째, 긴 유배 생활 동안 다산이 집필한 책이 동학군 지도자들이 읽고 동학혁명의 이론적 지침이 되었다고 하고, 또한 동학혁명기 동학군은 ‘다산비결’이라는 문건을 품속에 지니고 다녔다는 설도 전해지는데, 이 이야기들에 대한 실상은 무엇인가? 다섯째, 정약용의 집안은 우리나라 천주교의 발상지라 할 만큼 천주교와 인연이 깊다. 그런데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천주교를 버리고 가족들을 고발한 것으로 알려진 다산은 과연 배교자인가 아닌가? 그 진실은 무엇인가? 여섯째, 그의 수많은 저술 중에 후대에 유독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등만 널리 알려지고 읽히게 된 배경은 무엇 때문인가? 일곱째, 강진 유배지에서 18년 동안 책 500여 권을 저술했으나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와 18년을 더 살면서는 「자찬묘지명」을 짓고, 『흠흠신서』와 『매씨서평』 등을 수정하고, 이가환·정약전·권철신 등의 묘지명을 짓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저작을 남기지 않았는데, 왜일까? 여덟째, 그의 호는 사암(俟菴), 탁옹(?翁), 태수(苔?), 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 열수(洌水), 다산 등 여러 가지였고, 생전에 그는 다산이라는 호를 저술에 명기하지 않았고, 사암과 열수라는 호를 주로 사용했다. 「자찬묘지명」에도 ‘사암’이라는 호를 썼는데, 왜 후대에 이르러 열수나 사암 대신 다산이 호로 쓰이게 되었을까? 아홉째,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에 정을 나눈 여인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여인의 심정을 담은 시 〈남당사〉는 누가 지었으며, 인륜대사를 다산은 왜 모른 체했을까? ‘실학자’라는 좁은 틀에 가두기에는 너무 높고 깊다! 다산 정약용을 가리키는 말은 그 어느 인물보다 많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개혁사상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수백 권 쓴 저술가,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통합적인 인문학자, 전방위적인 지식경영자, 실천적 이론가, 조선의 엔지니어, 사회비평가, 우리 차(茶) 문화의 중흥자, 시 2,500수를 쓴 시인, 조선 최고의 메모광, 동학농민혁명을 불러일으킨 개혁사상가, 탈중화를 주장한 자주파, 문체반정에 호응한 약골 문인, 서학 사상의 개척자, 조선 시대 초기 천주교 신자, 근대를 연 민중주의자, 법학자, 행정가, 건축가, 의학자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다산을 흔히 ‘조선 후기의 실학자’라고 배우고 그렇게 알고 있다. 과연 그를 실학자라는 좁은 틀로 가둘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다산의 학문과 업적이 너무 높고 넓고 깊고 심오하다. 그의 관심 분야는 정치, 경제, 사회, 국방, 법률, 과학, 건축, 의학, 문학, 철학, 윤리, 역사, 지리, 음악, 예학, 천문 등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게다가 그가 남긴 태산 같은 유산에는 유용한 가치들이 차고 넘친다. 천 사람을 죽여도 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아무도 죽이지 않는 것과 같다! 다산은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살았다.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기질이 있고, 금수저를 물고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훌륭한 문중의 여성을 만나고, 정조라는 조선 최고 왕의 총애까지 받으며 인생의 절반은 평탄하고 성공적인 삶을 누렸다. 그러나 정조가 의문을 남기고 죽은 뒤부터 나머지 삶은 이전 삶과는 정반대의 불행과 불운이 그를 괴롭히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자식 6남 3녀 중 4남 2녀를 일찍 잃고, 후계자로 삼으려 한 조카 정학초(정약전의 아들)는 17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셋째 형 정약종(1760~1801)은 참수되고, 정약용과 둘째 형 정약전(1758~1816)은 머나먼 남녘 땅으로 유배되었다. 정약용의 지기(知己)이자 멘토였던 이벽(정약현의 처남)은 일찍 세상을 뜨고, 기대가 컸던 조카사위 황사영(정약현의 사위)은 소위 ‘백서 사건’으로 참형을 당했다.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다산이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자 반대파(서인)에서는 “천 사람을 죽여도 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아무도 죽이지 않는 것과 같다”라며 참소와 모함이 끊이지 않았다. 사활을 건 당파싸움 속에서 남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다산은 다행히 목숨을 건진 대신 18년의 긴 유배 생활을 견뎌야 했다. 그러나 모진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인동초처럼, 다산의 ‘다산다움’은 역경 속에서 더욱 빛났다. 추방과 유배라는 모진 고난을 겪으면서, 다산은 불굴의 신념과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정치가이자 관리에서 학자로 거듭난다. 유배지에서 민초의 삶을 직접 보고 겪으며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를 파헤치고, 그 시정책을 제시하는 각종 저술을 집필하는 데 전념했다. 정인보가 “한자가 생겨난 이후 가장 많은 책을 지은” 사람이라고 한 다산이 남긴 책은 무려 500여 권에 이른다. 요즘 책으로 치면 400쪽짜리 50여 권에 이르는 분량이다. 그 책의 대부분은 유배 시절에 썼다. 강진 시절의 제자 황상(黃裳)은 “우리 스승은 귀양지에서 18년 동안 저술에만 힘써 과골(?骨, 복사뼈)이 세 번이나 구멍 났다. 나중에 뼈가 시어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벽에 시렁을 매어놓고 서서 글을 썼다”라고 증언한다. 스스로 나라에 “털끝 하나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썼듯이, 다산의 저술 작업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골수까지 깊이 병든 국가를 개혁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의 모든 저술, 나아가서 생애를 관통하는 중심축은 개혁사상과 제도개혁, 즉 “낡은 우리나라를 새롭게 개혁한다”라는 뜻의 ‘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이었다. 조선의 기득권 수구세력의 거센 핍박을 받은 것도 다산의 이런 사상과 실천 때문일 것이다. ***저자에게 묻다*** (문) 지금까지 50여 종의 평전을 출간하셨습니다. 평전을 주로 쓰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역사의 주역은 인물이고, 따라서 역사는 곧 인물사입니다. 인물의 역할은 그만큼 중요하지요. 우리 근현대사는 그 어떤 나라와 민족보다 파란곡절이 많습니다. 따라서 근현대사의 굽이마다 어떤 인물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탐구하고 기록하는 일은 역사의 심층을 이해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소장하신 다산 정약용 관련 책이 130종, 논문까지 합치면 200종이 넘는다고 하셨습니다. 그 많은 자료를 읽고 한 사람의 삶을 정리하는 글을 쓸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답) 특별한 비결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틈나는 대로 고민하고, 자료를 찾고,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읽고 메모하고 글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면 반드시 새로운 의문과 허점이 생기고, 다시 다른 자료를 찾아 그 부족한 부분을 메우지요. (문) 우리나라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에 다산 정약용이 꼭 들어갑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답) 가히 ‘전인적 지성’이라 할 수 있는 그만의 독보적인 매력 때문이 아닐까요. 도무지 통하지 않은 분야가 없어요. 그래서 그를 가리키는 말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철학자, 개혁사상가, 저술가, 서예가, 과학자, 엔지니어, 사회비평가, 시인, 건축학자, 종교학자, 의학자, 법의학자, 행정가 등 많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분야도 허술하게 다루지 않았어요. 그가 관심을 둔 분야에서는 치열하게 공부하고 연구해서 전문성을 갖췄어요. 그렇게 그가 남긴 저술은 하나하나 보물과도 같고, 그 가치를 후대 사람들이 알고 존경하게 된 것이지요. (문) 정의와 공정이 화두인 지금 우리는 왜 다산 정약용에 주목해야 할까요? 왜 지금 다산 정약용을 읽어야 할까요? (답) 어느 시대나 ‘관제’ 정의와 공정은 있지요. 그런데 그것이 보편적이거나 피지배층의 관점과 차이가 크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산을 추방하고 귀양보내면서 지배층이 내건 이유도 ‘정의와 공정’이었어요. 실세 중 한 사람은 “천주교인 모두를 죽여도 다산을 살려두면 의미가 없다”라고 상소를 하기도 했지요. 그걸 그들은 ‘공정’이라 강변했어요. 그게 과연 공정했을까요? 그래도 다산은, 끝내 나라를 팔아먹게 되는 무능하고 부패한 위정자들을 탓하기보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백성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꿈꾸었어요. 그래서 세상이 어렵고 어지러울 때 다산의 삶에 감동과 위로를 받는 것 같습니다. (문) 다산 평전은 이미 여러 종류가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이 다른 여러 다산 평전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답) 기존 다산의 평전이나 전기들은 모두 가치 있는 책들입니다. 다만, 이 책에서는 기존 책에서 잘 다루지 않는 다산 선생의 인간적 또는 의도적 취약점도 가감 없이 기술했어요. 다산 선생도 완벽한 성인은 아니거든요. 물론 이런 허점마저 마치 후손들에게 일부러 남겨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긴 합니다(웃음). 강진 유배 시절에 취한 소실과 딸 문제, 정조의 ‘문체반정’에 순종한 비굴한 처사,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시’를 지어야 한다면서도 한글 시 한 편을 쓰지 않은 이유, 천주교에 대해 배교인지 아닌지 명확히 밝히지 못한 점 등이지요. (문) 태산 같은 높고 깊은 ‘다산’을 오르고 나서 느끼신 점은 무엇일까요? (답) 다산은 세계지성사에 내놔도 부족함이 없는 인물입니다. 독일의 지성 괴테, 프랑스의 지성 루소 등의 철학과 사상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지요. 그러나 조선(한국)이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다 우리 후예들의 책임인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문) 마지막으로 독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답) ‘통합적인 지성’을 원한다면 ‘다산(茶山)’에 오르기를 추천합니다. 조선 후기 퇴락한 주자학의 저수지 변두리에서 분출했던 실학, 실학의 중심부에서 솟구친 ‘다산학’은 암울했던 그 시대인이 후대에 물려준 학문과 개혁의 경전입니다. 조선 후기 전봉준과 김개남 등은 그 맥의 한 가닥을 해독하고 동학혁명의 기치를 들었지요. ‘다산’에 만학이 들어 있고, 애민정신과 진정한 정의와 공정의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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