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의 틈새로부터 빛나는 서사를 이끌어내며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해온 최민우 작가의 두번째 소설집 『힘내는 맛』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2012년 등단 당시 “이토록 강력한 실감과 생기 넘치는 인물들을 만난 건 몹시 오랜만”(소설가 권여선)이라는 평을 받으며 범상치 않은 작가의 등장을 알린 최민우는 핍진한 현실 묘사와 정감 가는 인물들, 그리고 반전이 있는 환상적 장치들을 통해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이끌어왔다. 이번 소설집은 훨씬 더 능숙하고 대담해진 최민우의 서사적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 평범한 듯 보이는 일상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과 고요한 풍경 이면에 숨어 있는 반전이 돋보인다.
이번 소설집에 엮인 일곱 편의 소설에는 공통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영업사원, 번역가, 계약직 사원, 자유기고가, 연구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특출한 능력을 가졌거나 높은 급여를 받는 인물들이 아니다. 이들은 코로나 때문에 직장에서 무급 휴직을 당하거나(「변함없는 기분」) 함께 일하던 후배가 그만두는 바람에 마음의 동요를 겪거나(「가을의 곡선」) 출장지에서 일어난 해프닝에 곤란해하는(「힘내는 맛」), 우리가 출근길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 법한 인물들이다.
그렇기에 인물들이 겪는 실패와 좌절은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우리가 그렇듯 인물들 또한 그들이 마주한 벽을 드라마틱하게 넘어서지는 못한다. 하지만 바로 이렇게 슬픔을 과장하지도 회복을 단언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최민우는 우리에게 뜻밖의 진실을 일깨워준다.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몫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는, 평범하지만 분명한 위로를 주는 그 진실을 말이다.
저자 소개
저자 : 최민우
2012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머리검은토끼와 그 밖의 이야기들』, 장편소설 『점선의 영역』 『발목 깊이의 바다』가 있다. 제3회 이해조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목 차
우주의 먼지 _007
보라색 사과의 마음 _037
변함없는 기분 _063
가을의 곡선 _095
보호색 _127
요시히로의 자리 _157
힘내는 맛 _189
해설 | 이지은(문학평론가)
무뎌지는 맛 _221
작가의 말 _243
출판사 서평
무뎌져버린 당신의 미각을 두드릴
일곱 가지 달콤씁쓸한 맛!
“최민우의 소설을 읽다보면 우리는 쓸쓸하면서 온기가 느껴지거나
애틋하면서 서늘한 묘한 지점에 도착하게 된다.”_문지혁(소설가)
평범한 일상의 틈새로부터 빛나는 서사를 이끌어내며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해온 최민우 작가의 두번째 소설집 『힘내는 맛』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2012년 등단 당시 “이토록 강력한 실감과 생기 넘치는 인물들을 만난 건 몹시 오랜만”(소설가 권여선)이라는 평을 받으며 범상치 않은 작가의 등장을 알린 최민우는 핍진한 현실 묘사와 정감 가는 인물들, 그리고 반전이 있는 환상적 장치들을 통해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이끌어왔다. 이번 소설집은 훨씬 더 능숙하고 대담해진 최민우의 서사적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 평범한 듯 보이는 일상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과 고요한 풍경 이면에 숨어 있는 반전이 돋보인다.
이번 소설집에 엮인 일곱 편의 소설에는 공통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영업사원, 번역가, 계약직 사원, 자유기고가, 연구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특출한 능력을 가졌거나 높은 급여를 받는 인물들이 아니다. 이들은 코로나 때문에 직장에서 무급 휴직을 당하거나(「변함없는 기분」) 함께 일하던 후배가 그만두는 바람에 마음의 동요를 겪거나(「가을의 곡선」) 출장지에서 일어난 해프닝에 곤란해하는(「힘내는 맛」), 우리가 출근길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 법한 인물들이다. 그렇기에 인물들이 겪는 실패와 좌절은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우리가 그렇듯 인물들 또한 그들이 마주한 벽을 드라마틱하게 넘어서지는 못한다. 하지만 바로 이렇게 슬픔을 과장하지도 회복을 단언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최민우는 우리에게 뜻밖의 진실을 일깨워준다.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몫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는, 평범하지만 분명한 위로를 주는 그 진실을 말이다.
고단한 어제와 오늘을 지나 새로운 마음으로 내일을 시작하기 전,
잠시 앉아 마음을 돌보며 한 잔 들이켜는 재충전의 맛
소설집의 문을 여는 「우주의 먼지」는 영업사원 한철이 우연히 연극을 배우면서 시작된다. 거래처 직원로부터 표정이 딱딱하다는 지적을 받은 한철은 그걸 고치기 위해 연극을 배우게 되고, 뜻밖에 연극 수업을 받는 동안 그간 경험해보지 못했던 행복을 느낀다. 평소 회사일과 가족에 얽매여 살아온 한철은 연극을 하며 무대 위에는 자신뿐임을 인식하고 비로소 자유롭다는 감정을 느낀다. 그는 연극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직장을 그만둘 결심까지 하지만, 공연장에 가족들이 찾아오면서 그의 꿈은 산산히 부서진다. 한철은 자신이 가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즉 “자기가 가질 뻔했던 것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34쪽)아챈다. 달콤하기만 했던 한철의 꿈이 현실의 침입으로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 것이다.
가족이라는 족쇄에 얽매인 인물은 또 있다. 표제작인 「힘내는 맛」의 경완은 인문연구소에서 근무하며 자신의 동료이자 연인인 상아와 함께 유학을 가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부모가 경완이 유학 자금으로 모아둔 돈으로 형을 도와야 한다고 다그”(208쪽)치면서 경완의 꿈 역시 흩어져버린다. 유학을 포기하고 상아와도 멀어진 뒤 복잡한 마음으로 출장길에 오른 경완은 먹고 싶지 않은 점심 메뉴를 먹게 된 상황에서 “스스로의 의지에 관계없이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때”(207쪽)가 있다고 자조하는데, 이는 가족이라는 족쇄에 묶여 자신의 의지와 감정을 억누르는 경완의 현재 상황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말일 것이다.
「보라색 사과의 마음」 속 은영 또한 자신의 감정을 쉽게 표출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은영은 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은 이후 무너져버린 부모님 대신 “상황을 파악하고, 장례를 치르고, 공판에 참석하는”(43쪽) 일들을 처리하고, 그러는 동안 단 한 번도 울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은영에게 “어느 순간 댐이 무너지듯 슬픔이 밀려올 거라고”(44쪽) 말하지만 은영에게는 그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동생의 마지막 순간을 계속해서 되짚으며 수수께끼로 남아버린 단 몇 분의 상황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은영은 병원에서 상담을 받고 약도 처방받아 먹는 아버지와 달리 이 슬픔을 극복할 수 없다. 슬픔을 느끼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을의 곡선」의 진송 역시 비슷한 상황을 겪는다. 진송은 자신과 절친했던 동료 혜진의 갑작스러운 이직 통보에 서운함을 느끼지만 그 감정을 부인한다. 그는 의도적으로 “그 모든 것이 이유일 수도 있었지만, 그중 어떤 것도 아닐 수 있었다”(104쪽)며 자신이 느끼는 서운함을 외면한다. 코로나로 무기한 휴직을 당한「변함없는 기분」 속 상진도 그렇다. 상진은 휴직중 회사 대표의 연락을 받는다. 회사에서 제작하는 팟캐스트의 진행자였던 윤미 선생이 자신의 SNS에 회사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면서, 윤미 선생에게 그 글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라는 것이다. 상진은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는 대표의 부당한 요구를 전하기 위해 윤미 선생을 찾아가 그녀를 설득한다. 불편한 자리에서 돌아온 상진은 “외로운 것도 슬픈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닌 기분”(93쪽)을 느낀다고 말하는데, 상진의 막막한 상황을 떠올려보면 그는 지금 외롭고 슬프고 괴로운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진을 비롯한 인물들은 왜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걸까.
이들은 모두 상처받지 않기 위해 일부러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처럼 보인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진짜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무감해지려고 함으로써 일상이 흔들리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이다. 이들의 의도된 무감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현실을 어떻게든 견디기 위한 방어기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절망을 절망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이들의 평안한 일상에는 균열이 생긴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아무렇지 않다는 거짓 감정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 반복되는 삶에서는 매일 같은 맛이 난다.
좀더 ‘맛있게’ 살아가는 방법은 없을까?
그런가 하면 자기 자신의 본질까지 억누르려는 사람들도 있다. 「보호색」의 ‘나’는 선배의 부탁으로 사진관 주인을 인터뷰하러 나갔다가 그와 갈등을 겪는다. 처음에 ‘나’는 사진관 주인이 별 이유 없이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에 대해 전혀 짐작하지 못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나’가 이전 직장에 있을 때 악연이 있던 인물이었다. 그가 대대적인 성형수술을 하고 자신의 신변을 철저하게 감춘 탓에 그를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사진관 주인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모종의 이유로 이전 직장과 거리를 두고 싶어한다. 둘은 각자의 과거를 숨기고 자신만의 보호색을 두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요시히로의 자리」의 ‘나’는 조금 더 특수한 경우에 처해 있다. ‘나’와 아내 정화는 오래도록 비어 있던 옆집에 입주할 예정인 일본인 ‘요시히로 씨’의 정체를 궁금해한다. 요시히로 씨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나’는 그의 집 바닥에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는 걸 보게 된다. 더욱 수상한 건 시간이 흘러도 요시히로 씨는 이사를 오지 않고, 정화의 행방이 갑자기 묘연해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가 회사에서 횡령을 저질러온 사실이 밝혀진다. 경찰에 쫓기게 된 ‘나’는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신분을 숨긴 채 생활하고, 한 골목에서 시비가 붙자 자신을 일본에서 온 ‘요시히로’라고 거짓말하기에 이른다. 요시히로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의 집에 난 구멍은 대체 무엇일까. ‘나’와 요시히로는 어떤 관계일까. 중요한 것은 ‘나’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겨왔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본질을 숨기는 것만이 평온한 일상을 이어나가는 해결책일까. 인물들의 곁에서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인물들이 우연히 만나게 되는, “다시 볼 일 없”(207쪽)는 타인들이다. 「힘내는 맛」의 고승재, 「보라색 사과의 마음」의 이소벨, 그리고 「가을의 곡선」의 크리스티안이 그렇다. 「힘내는 맛」의 경완은 출장지에서 만난 승재에게 그간 자신이 억눌러온 감정을 표출해 보인다. 승재는 그에 응답하듯이 경완에게 자신의 복잡한 가정사와 막막한 진로에 대해 털어놓는다. 「보라색 사과의 마음」의 이소벨은 은영이 번역하는 책의 저자로, 은영이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은영에게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제게도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경험이 있”(58쪽)다고 고백한다. 「가을의 곡선」 속 크리스티안도 혜진에 대한 서운함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부정하는 진송에게 자신이 스승과 갈등했던 이야기를 하며 이렇게 말한다. “겪어보지 못한 일”이지만 “모른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126쪽)다고.
이소벨은 은영에게 보내는 메일의 말미에 이렇게 적는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아무리 희미할지언정 어떤 식으로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59쪽) 다시 볼 일이 없기에 서로의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털어놓는 이 인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이 연결되어 있으며, 각자 다른 경험을 했지만 그 경험이 어느 정도 닮아 있음을 인식하게 되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경완이 승재가 ‘힘내는 맛’이라며 건넨 음료를 받아드는 장면이나 은영이 마침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잔잔한 울림을 남긴다.
그렇다면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직시하고 상처를 극복해내야만 제대로 사는 것일까. 최민우의 소설은 한 가지 방법이 옳다는 식으로 우리에게 삶의 이정표를 제시하지 않는다. 「가을의 곡선」에 등장하는 미술가는 “깨진 부분을 감추는 게 아니라 더 돋보이게” 만드는 수선 기법인 ‘긴쓰기’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련이 가치를 갖는”다거나 “시련이 사람을 강하게”(118쪽)한다는 낙관적인 말들에 의문을 표한다. “어쩌면 시련을 극복할수록 더 엉망이 되지 않을까요?”(119쪽) 이 말은 작가 최민우가 독자들에게 건네는 말로 읽히기도 한다. 시련을 극복하는 것만이 삶의 정답은 아니라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껴도 괜찮고 회피해도 괜찮다고, 어떤 방법이든 자신의 마음과 삶을 지켜낼 수 있다면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좋다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나는 당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당신은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모”(「가을의 곡선」, 52쪽)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종이컵에 실을 이어 만든 장난감 전화로 속삭이는 어린아이들처럼” (「가을의 곡선」,59쪽)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모른다고 할 수도 없”는 경험을 갖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서로 닮은 경험을 지닌 우리는 또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서로에게 ‘힘내는 맛’ 음료를 건넬 수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소설집의 제목인 ‘힘내는 맛’을 들여다보자. ‘힘나는 맛’도 아니고 ‘힘내는 맛’이라니.「힘내는 맛」 속 경완이 지적했듯이 이 음료는 엉터리처럼 보일 수도 있다. 최민우가 우리에게 건네는 일곱 편의 『힘내는 맛』은 힘이 저절로 솟아오르게 하는 마법의 약이 아니다. 하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 잠깐 한숨 돌리며 마시는, 다음 발걸음을 떼게 할 에너지를 주는, 그리하여 우리가 직접 힘을 낼 수 있도록 어깨를 툭툭 치는 매력적인 맛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