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두려움과 냉철함이 자립(自立)의 시로 흡인력 있게 전달되고 넘치는 기세와 필치가 활달하다”(정한아, 박소란)는 평을 받으며 출발하는 시인 윤초롬의 첫 시집 『햇빛의 아가리』가 아침달 시집 49번째로 출간되었다. 윤초롬은 이번 시집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하는 신인으로, “피”로 물든 삶을 생활감 있게 그려내며 하양, 검정 등 극적으로 대비되는 색채감을 더해 존재의 희망과 절망을 극명하게 포개는 기묘한 하모니로 그려낸다.
시 속 화자들은 마치 “자기 피를 보고 웃는”(「엄마 딸이 죽었습니다」) 사람처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심리적 출혈을 겪으면서도 현실을 극복하기보다 그저 이 험난하고 비참한 일들을 조소하면서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이 되고 싶은 심정을 가족 서사로 녹여낸다. 가족은 피로 묶이는 최초의 공동체이며 인간이 세계에 입성하는 순간 가장 먼저 믿음으로 결속되는 관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족이 해체되면서 ‘피’는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피의 끈질”(「황혼」)긴 슬픔이 된다.
추천사를 쓴 시인 박소란은 이번 시집에서 보여주는 처절한 삶의 고투를 증명하는 언어를 “자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침잠해본 사람에게서 길어진 것”이라 말한다. 이번 시집은 총 4부 구성으로, 46편의 시를 통해 삶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상처로 뒤섞인 현실을 생동하는 장면으로 포착하고 불온한 정체성을 하나의 이야기로 기워낸다.
저자 소개
저자 : 윤초롬
시집 『햇빛의 아가리』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목 차
1부
피와 생활의 하모니
이따금
엄마 딸이 죽었습니다
회복기
취조실
황혼
잠든 사람
다만 눈이 내리는 풍경
바위의 딸
2부
꿈꾸지 않았다 그러나
빨래
지우지 않겠습니다
문제아
끝에서
생물 시간
유충과 성충
그해 겨울
외국인의 편지
구멍
스테인드글라스
눈사람
프레임
밤이 세계의 뒤집힌 안감이라면
3부
나는 치사량의 침묵
타이레놀
수속
살균
흰 뱀들
비정상
서빈백사
앙상한 가지
시인 아닌 사람이 쓴 시
홍옥
홍 매화 흰 매화 산책
앉는 연습
우리 돌기
가위는 서랍 안에 있다
4부
시원한 곳으로 가자
계단을 오르는 사람
재배
자세의 비결
사혈의 원리
사랑하는 사람
개를 데려올까
추모 공원
서클
바깥 산책
뼈
도마 위
다른 방식
산문
시와 솔직함
출판사 서평
“네가 외롭지 않게 네가 너의 힘을 느낄 수 있게”
생활이 앓는 몸살을 솔직함으로 돌파하는 시
피투성이로 범벅된 삶의 가난한 장면 안에서 솔직하고 명징한 언어로 새로운 시적 태동을 감지하는 시인 윤초롬의 첫 시집 『햇빛의 아가리』가 아침달 시집 49번째로 출간되었다. 아침달 큐레이터인 시인 정한아, 박소란으로부터 “슬픔과 두려움과 냉철함이 자립(自立)의 시로 흡인력 있게 전달되고 넘치는 기세와 필치가 활달하다”는 평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는 시인 윤초롬은 이번 시집에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는 당신에게”(시인의 말) 작은 아름다움이라도 발견할 수 있도록 흥건한 “피”의 현장을 담아낸다.
이번 시집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피’다. 시인은 피와 생활이 끈적하게 섞이는 “하모니”(「엄마 딸이 죽었습니다」)를 말하기 위해 다양한 색채감을 활용하는데, 주로 쓰는 색깔은 피의 색인 “빨강”과 “하양”과 “검정”이다. 그리고 시집 전체를 피의 감각으로 물들이기에 앞서 시인은 모든 세계를 “하얗다”(「이따금」)고 말한다. 시인은 하얗게 뒤덮여버린 세계에서 “나풀거리는 기억들”처럼 방황하고 “여기와 저기를 분간하지 못해” “백치”라는 “별명”을 얻는다. 백치는 주로 일상에서 ‘순진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만 시집을 읽어나갈수록 이 별명은 폭력적이고 비참한 현실 앞에 무너진 자신이 항복하기 위해 드는 백기이자 피폐해진 정신을 다잡지 못하는 백지라는 의미를 새롭게 입는다. 시인에게 검정과 하양은 모두 “시력을 잃어가는 공포”(「끝에서」)이자 “번져가는 시야”(「회복기」)여서, 자신이 흘린 피를 연하게 해주지만 그에 따르는 대가로 삶의 일부를 포기해야 한다.
시인은 생활의 장면 속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뒤 남아 있는 뼈와 살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솔직한 발화를 선택한다. 하지만 시집에 수록된 산문 「시와 솔직함」에서 시인은 이 방법에 대해 회의를 갖는다. “왜 어떤 솔직함은 징그럽기만 할까”라는 질문에는 누군가의 아픔이 작품으로 전시되면서 삶을 고백하는 형태가 예술 작품에 담겨 고유해지고 특별해지는 현상이 부정한 알리바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솔직함까지 반성한다. 그럼에도 시인이 부서지는 삶의 모든 순간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솔직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까닭에는 유일하게 희망적 메시지가 담긴 마지막 시 「다른 방식」에 있다. 시인은 “서빈백사”라는 모래사장에서 만난 “흰모래”와 “흰빛”을 피로 환원하지 않고 비참했던 어느 여름을 눈부신 세상으로 돌본다. “좋은 사람”을 떠올리면서 “네가 외롭지 않게/ 네가 너의 힘을 느낄 수 있게” “나를 파괴하지 않”(「다른 방식」)겠다고 말하는 용기의 근원은 솔직한 언어로 삶의 치부를 고백하는 직진성에서 발현된다. 추천사를 쓴 시인 박소란의 말처럼 윤초롬의 시는 “스스로를 감추고 짐짓 세련된 태도로 적정 간격을 유지하는 것을 어떤 본령으로 여기는 때, 그 흐름을 가뿐히 거스를 줄 안다”. 솔직함은 윤초롬 시인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몸과 영혼을 보존하는 방식이다.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상처를 받은 자는 시 쓰기의 솔직함으로 자기 자신을 “부정출혈”(「유충과 성충」)이자 “사혈”(「사혈의 원리」)이라고 피칠갑적으로 명명하는 인식에서 해방된다.
가족이라는 피의 서사
살과 뼈가 사라지는 동안에도
몸과 영혼을 보존하기
피를 토하고 흘리면서 아름다움을 말하는 방식이란 무엇일까. 그 처절하고도 절박한 발화의 이면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시 속 화자들이 처한 생활 현장을 몸으로 체험해야만 한다.
시인이 시에 담은 화자들은 거의 대부분 가족 구성원이다. 시인은 가족을 피의 공동체로 묶는다. 시집 전체에 담긴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매끄럽고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피를 나누고 섞이면서 결연해지는 가족은 시집에서 총 네 명의 인물을 다룬다. 그중 핵심에 속하는 ‘아버지’는 “범죄자”(「취조실」)고 자살을 시도하면서(「황혼」) 가정 폭력을 일삼아 가족에 균열을 내어 해체하는 인물이다. ‘어머니’는 가난해진 현실을 견디다 안암에 걸려 투병하는 자이고, ‘언니’와 ‘동생’은 유일하게 서로의 아픔을 돌볼 수 있는 관계다. 가족이 겪는 시련을 삶의 토대에 간신히 놓을 수 있는 방법으로 시인은 “앙상한 비유”(「지우지 않겠습니다」)를 택한다. 즉 시인이 말하는 피의 물성도 마찬가지로 삶을 지탱하기 위한 일종의 비유이자 “희고 반투명하고 액체도 고체도 아닌 덩어리”(「추모 공원」)로서 가족 전체를 은유한다.
가족이 남긴 상처는 공동의 몫이면서도 개인의 체질로 이어진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유독 부서진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나’라는 존재 역시 “피”와 “살”과 “뼈”로 이루어진 공동체라고 말해볼 수 있다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본질적으로 죽음이라는 해체에 맞닥뜨릴 운명이며 육체가 해산되는 순간을 한 번쯤 상상해보게 된다. 시집 1부와 2부에서 가족 전체가 짊어지는 가난과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면, 3부와 4부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관통하면서 겪는 자신을 존재론적으로 사유한다. “내가 사람이라니 믿을 수 없”(「앉는 연습」)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참혹한 장면들이 시야에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듯 자신의 육체 또한 부서진다는 감각이 온몸에 전이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을 다 헤아린 후 마지막으로 제목을 살펴보면 독자는 “햇빛의 아가리”라는 강렬한 제목을 만나게 된다. 시인은 풀밭에 몰려오는 주황빛 기운을 따스한 이미지로 표현하기를 거부하고 햇빛이 지닌 동물성을 포착하여 육화한다. 이에 주변화되는 화자는 “걸을 곳”(「바깥 산책」)을 “잃어가”지만 모두에게 다음과 같은 산책을 요청한다. “시원한 곳으로 가자”고, “멀리멀리 전진”하자고. 시인은 햇빛을 늘 안온한 시선으로 따뜻하게 말하는 자가 아님을 거듭 확인하기 위해, 그 속에 담긴 본능적 슬픔을 감각하고 주변으로 밀려나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보호하려는 의지를 ‘입’에서 말로, 말에서 문장으로 힘차게 걸어가는 발걸음을 주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