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들을 용서할게. 그리고 나도 모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게. 됐지?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줘.”
1950년 여름, 체사레 파베세는 『아름다운 여름』으로 이탈리아 최고 권위의 스트레가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불과 두 달 뒤, 그는 토리노의 작은 호텔 방에서 유서를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파베세가 마지막으로 남긴 짧은 유서는 그가 평생 문학 속에서 응시해 온 고독과 허무를 압축한 듯하다.
토리노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출판사 에이나우디의 핵심 편집자였던 파베세는 파시즘 체제에서 수감 생활을 거친 뒤 번역과 비평으로 미국 문학을 이탈리아에 소개했다. 그의 영향은 이탈로 칼비노를 비롯한 수많은 동시대 작가들에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단순한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유는 언제나 인간 존재의 고독과 사랑의 실패, 구원 없는 각성을 탐구하는 독자적인 문학 세계에 있었다.
그의 대표작이자 중편소설인 『아름다운 여름』은 십 대 소녀 지니아가 겪는 사랑과 욕망, 배신을 통해 개인이 피할 수 없는 고독의 운명을 보여준다. 눈부신 계절인 여름은 청춘과 사랑의 열기를 상징하면서도, 동시에 허망하고 덧없는 순간의 은유로 자리한다. 지니아가 맞닥뜨리는 불안과 열정, 설렘과 두려움은 결국 하나의 성장 서사로 귀결되지만, 그 끝에서 마주하는 것은 환희가 아닌 차가운 각성이다.
『아름다운 여름』은 빛나는 청춘의 찰나와 그 뒤에 드리운 그림자를 포착한다. 파베세가 남긴 질문, “우리는 왜 사랑하고, 왜 고독한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2023년 라우라 루케티 감독에 의해 영화로 재탄생한 이 작품은 지금도 서늘한 울림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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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 체사레 파베세
시인, 소설가, 번역가. 1908년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주의 작은 마을 산토스테파노벨보에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누이 손에서 자랐으며 토리노로 이주해 학업을 마쳤다. 다첼리오고등학교 때 작가이자 반파시즘 활동가인 교사 아우구스토 몬티에게서 큰 영향을 받고, 영문학을 공부하던 토리노대학 때는 레오네 진츠부르그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과 사귀며 문학적 야망을 키운다. 1932년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번역 출간한다. 파시즘에 맞서고 당대 문학을 쇄신하는 방편이었던 파베세의 미국 문학을 향한 열정은, 엘리오 비토리니와 함께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문학을 여는 계기가 된다. 1935년 허스키한 목소리의 여인을 지키려다 공산당 협력자로 몰려 파시즘 정권으로부터 감금 3년형을 받고 남쪽 바닷가 브란칼레오네 마을로 유배된다. 그 무렵 소용돌이치는 속내를 하루하루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일기 쓰기는 확고한 습관으로 굳어진다. 1936년 사면되어 토리노로 돌아와 첫 시집 『피곤한 노동』을 펴낸다. 초창기 에이나우디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으며 이때 많은 작품을 구상한다. 이차대전 발발로 파시스트군에 징집되지만 천식을 이유로 면제되어 반년가량 로마에 머문다. 1943년 에이나우디에서 『피곤한 노동』 최종판을 내면서 시인으로서의 한 시절이 끝났음을 선언한다. 이차대전 종전 후 공산당에 입당해 당 기관지 『루니타』 편집에도 참여한다. 이후 소설에 매진한다. 왕성한 창작열로 『동지』 『닭이 울기 전에』 『언덕 위의 집』 등을 발표하고, 독특한 형식의 『레우코와의 대화』 같은 작품을 내놓는가 하면, 1949년작 『아름다운 여름』으로 1950년 이탈리아 최고 권위의 스트레가 문학상을 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유명 작가로 발돋움한 그해 여름, 갑자기 세상을 등져 많은 이를 충격에 빠트렸다. 같은 해 봄에 출간됐던 『달과 불』은 그의 마지막 소설로 남게 된다. 사후에 시집 『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가 출간되었고, 유배 시절부터 썼던 방대한 일기가 『삶이라는 직업』이란 제목의 책으로 엮여 출간되었다.
역자 : 이열
나무 사진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수안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때 서울로 이주하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사진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객석 사진기자를 하다 인물과 패션 사진을 공부하러 이탈리아로 갔다.
밀라노에 사는 동안 ‘Car Test’, ‘AUTO’란 잡지의 특파원을 하며 기사를 쓰고 기행문을 연재하였다.
『세속 도시의 시인들』, 『메르스의 영웅들』 등 몇몇 단행본의 사진 작업을 하였고, 나무에 관한 에세이 『느린 인간』을 글항아리에서 출간하였다.
지금도 세계의 경이로운 나무들 소식을 접할 때면 마치 첫사랑의 순간처럼 가슴이 뛰어 카메라 가방을 꾸려 떠날 채비를 한다.
목 차
책 머리에
아름다운 여름
옮긴이의 말
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그 시절의 삶은, 마치 끝도 없는 축제 같았다. 집을 나서 길을 건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곧잘 제정신을 잃었다.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특히 밤은 더욱 그러했다. 죽도록 피곤에 절어 돌아가는 길에도 마음은 여전히 무언가를 갈망했다. 불이라도 나 주기를, 집 안 어딘가에서 아기가 태어나 주기를, 아니면 느닷없이 새벽이 찾아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주기를. 그리고 우리가 들판을 지나 언덕 저편까지 걷고 또 걷는 날이 오기를.
(P. 16)
그는 화가처럼 보이지 않아서 더 멋졌다. 처음 만났을 때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내민 손, 어두운 방 안에서 들려오던 그의 목소리, 불이 켜진 순간 로드리게스와 아멜리아와는 별개로 마치 둘만 있는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P. 70)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만이라도 그를 다시 만나야만 했다. 아멜리아가 왜 귀도가 아닌 로드리게스와 관계를 가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멜리아와 귀도가 함께 유리잔을 깨뜨리던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때 자명종이 울렸다. 그녀는 이미 깨어 있었고, 따스한 이불 속에서 수많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첫 새벽빛이 스며들자 지니아는 이제 겨울이 된 것을 안타까워했으며, 그 아름다운 햇빛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것을 슬퍼했다. 귀도는, 색이 전부라고 말했었지.
‘정말 아름다워.’
지니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P.93)
‘귀도 앞이라면 포즈를 취해도 괜찮을 텐데.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아멜리아가 자신보다 훨씬 더 성숙한 몸매를 가졌다는 것을. 화가라면 당연히 아멜리아를 선호할 것이다. 아멜리아는 이미 다 자란 여자였다.(P.95)
부티크를 나설 때마다 늘 어떤 새로운 일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기를 바랐고, 무엇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 것을 알게 되면 하루가 통째로 사라진 듯한 허탈감을 맛보았다. 그녀는 내일이 오기를, 모레가 오기를, 아니 결코 오지 않을 어떤 것을 기다렸다.
‘난 아직 열일곱도 안 됐잖아.’ 그녀는 생각했다. ‘앞으로도 시간은 얼마든지 있어.’
하지만 아멜리아는 왜? 그날 모자도 안 쓰고 쫓아왔던 아멜리아는 왜 더는 나타나지 않는 걸까? 혹시 내가 무슨 말을 할까 봐 겁을 먹은 걸까?(P.100)
유리창을 통해 약간의 빛이 들어왔다. 지니아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셔츠를 통해 느껴지는 체온이 따뜻했다. 그들은 소파에 앉았고, 지니아는 말없이 울었다.
‘만약 귀도도 같이 울어준다면….’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 한가운데가 뜨겁게 조여오는 듯했고, 온몸이 녹아버릴 것 같아 기절할 것만 같았다.
갑자기 그 온기가 사라졌다. 지니아는 눈을 떴다.
귀도가 일어서서 그녀를 당혹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우는 기분이 들어서 그녀는 울음을 그쳤지만, 그 시선 아래서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진정해.” 귀도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린 세상에 이렇게 잠시 머물 뿐인데, 이런 일로 울 필요는 없는 거잖아.”
“너무 행복해서 우는 거야.” 지니아가 조용히 답했다.
“그럼 다행이네.” 귀도가 말했다. “다음엔 미리 말해줘야 해!” (P.109)
귀도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행복해?” 그가 물었다. 그들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지니아는 그의 눈을 보지 않으려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난 두려워. 네가 날 사랑하지 않을까 봐.” 그녀가 말했다.
(P.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