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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문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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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문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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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28403189
쪽수 : 495쪽
임성주 이상현  |  한국고전번역원  |  2015년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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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저자 소개
저자 : 임성주

저자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1711~1788)는 조선 후기의 학자로, 서경덕, 이황, 이이, 기정진, 이진상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 6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인이며, 송명흠(宋明欽)?송문흠(宋文欽)?김원행(金元行) 등과 교유하였다. 1750년 익위사 세마가 되었고 이어 익위사 시직, 공조 좌랑, 임실 현감 등을 지냈다. 1758년 공주 녹문에 은거하였다. 1762년 익위사 위솔이 되어 세손이었던 정조(正祖)를 보도하였다. 이후 사옹원 주부, 전주 판관, 성주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774년 사직하고 공주 녹문, 원주 산호(山湖) 등지에서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초년에는 스승인 이재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에 동조하였으나, 점차 기존 학설을 비판하고 이기동실(理氣同實)의 이기론(理氣論)을 정립하였다. 1845년 대사헌 겸 성균관좨주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목 차
일러두기
해제
녹문선생문집 서문
범례

녹문집 제1권
서 書
도암 이 선생에게 올리는 글 上陶庵李先生
도암 이 선생에게 올리는 글 경술년 19월上陶庵李先生 庚戌十月
도암 이 선생에게 올리는 글 정사년 3월 上陶庵李先生 丁巳三月
도암 이 선생에게 올리는 글 을축년 가을 上陶庵李先生 乙丑秋
섬촌 민장에게 보내는 글 경신년 윤6월 與蟾村閔丈 庚申閏六月
섬촌 민장에게 답하는 글 8월 答蟾村閔丈 八月
섬촌 민장에게 답하는 글 答蟾村閔丈
섬촌 민장에게 답하는 글 12월 答蟾村閔丈 十二月
섬촌 민장에게 답하는 글 신유년 1월 答蟾村閔丈 辛酉正月
섬촌 민장에게 답하는 글 계해년 7월 答蟾村閔丈 癸亥七月
섬촌 민장에게 보내는 글 무진년 3월 與蟾村閔丈 戊辰三月
증소 김장에게 보내는 글 계축년 3월 與??金丈 癸丑三月
병계 윤장에게 보내는 글 신사년 2월 與屛溪尹丈 辛巳二月

녹문집 제2권
서 書
미호 김공에게 보내는 글 을묘년 12월 與渼湖金公乙卯十二月
미호 김공에게 보내는 글 與渼湖金公
미호 김공에게 답하는 글 정사년 9월 答渼湖金公 丁巳九月
미호 김공에게 답하는 글 무오년 가을 答渼湖金公戊午秋
미호 김공에게 보내는 글 경신년 윤6월 與渼湖金公 庚申閏六月
미호 김공에게 보내는 글 신유년 봄 與渼湖金公 辛酉春
미호 김공에게 답하는 글 5월 答渼湖金公 五月
미호 김공에게 보내는 글 임술년 10월 與渼湖金公 壬戌十月
미호 김공에게 답하는 글 기모년 答渼湖金公 己卯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與?泉宋兄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與?泉宋兄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12월 與?泉宋兄 臘月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與?泉宋兄
역천 송형에게 답하는 글 갑인년 4월 與?泉宋兄 甲寅四月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5월 與?泉宋兄 五月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을묘년 1월 與?泉宋兄 乙卯正月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與?泉宋兄
역천 송형에게 답하는 글 答?泉宋兄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변진년 1월 與?泉宋兄 丙辰正月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7월 與?泉宋兄 七月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정사년 與?泉宋兄 丁巳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12월 與?泉宋兄 十二月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무오년 8월 與?泉宋兄 戊午八月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기미년 5월 與?泉宋兄 己未五月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10월 與?泉宋兄 十月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11월 與?泉宋兄 十一月
역천 송형에게 답하는 글 신유년 1월 答?泉宋兄 辛酉元月
역천 송형에게 답하는 글 4월 答?泉宋兄 四月
역천 송형에게 답하는 글 6월 答?泉宋兄 六月
역천 송형에게 답하는 글 10월 答?泉宋兄 十月
역천 송형에게 답하는 글 병인년 11월 答?泉宋兄丙寅十一月
역천 송형에게 답하는 글 무진년 4월 答?泉宋兄 戊辰四月
역천 송형에게 답하는 글 기사년 1월 答?泉宋兄 己巳元月
역천 송형에게 답하는 글 7월 答?泉宋兄 七月

녹문집 제3권
서 書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신미년 2월 與?泉宋兄 辛未二月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계유년 8월 與?泉宋兄 癸酉八月
역천 송형에게 답하는 글 기묘년 8월 答?泉宋兄 己卯八月
역천 송형에게 답하는 글 答?泉宋兄
역천 송형에게 답하는 글 9월 答?泉宋兄 九月
역천 송형에게 답하는 글 경진년 11월 答?泉宋兄 庚辰十一月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임오년 11월 與?泉宋兄 壬午十一月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與?泉宋兄
역 송형에게 답하는 글 3월 答?泉宋兄 三月
역천 송형에게 답하는 글 을유년 7월 ?泉宋兄 乙酉七月
역천 송형에게 답하는 글 8월 答?泉宋兄 八月
역천 송형에게 보내는 글 與?泉宋兄
역천 송형에게 답하는 글 병술년 7월 答?泉宋兄丙戌七月
역천 송형에게 답하는 글 정해년 12월 答?泉宋兄 丁亥十二月
송형 사행에게 답하는 글 임자년 答宋兄士行 壬子
송형 사행에게 답하는 글 갑인년 4월 答宋兄士行 甲寅四月
송형 사행에게 답하는 글 병진년 1월 答宋兄士行 丙辰元月
송형 사행에게 보내는 글 정사년 2월 與宋兄士行 丁巳二月
송형 사행에게 보내는 글 기미년 10월 與宋兄士行 己未十月
송형 사행에게 보내는 글 12월 與宋兄士行 十二月
송형 사행에게 답하는 글 경신녀 8월 答宋兄士行 庚申八月
송형 사행에게 답하는 글 신유년 2월 答宋兄士行 辛酉二月
송형 사행에게 답하는 글 11월 答宋兄士行 十一月
송형 사행에게 보내는 글 임술년 5월 與宋兄士行 壬戌五月
송형 사행에게 보내는 글 갑자년 8월 與宋兄士行 甲子八月
송형 사행에게 답하는 글 정묘년 1월 答宋兄士行 丁卯正月
송형 사행에게 답하는 글 答宋兄士行
송형 사행에게 답하는 글 答宋兄士行
송형 사행에게 보내는 글 與宋兄士行
송형 사행에게 보내는 글 與宋兄士行
송형 사행에게 답하는 글 答宋兄士行
송형 사행에게 답하는 글 부지년ㄴ 2월 答宋兄士行戊辰二月
송사능에게 답하는 글 병진년 答宋士能 丙辰
신성보에게 보내는 글 기미년 8월 與申成父 己未二月
신성보에게 보내는 글 신유년 2월 與申成父 辛酉二月
신성보에게 답하는 글 무진년 答申成父 戊辰
신성보에게 답하는 글 答申成父
김자정에게 답하는 글 갑자년 4월 答金子靜 甲子四月
권형숙에게 답하는 글 갑자년 5월 答權亨叔 甲子五月
김유도에게 답하는 글 신사년 7월 答金幼道 辛巳七月
김유도에게 답하는 글 임오년 10월 答金幼道 壬午十月
김유도에게 답하는 글 계미년 3월 答金幼道 癸未三月
김유도에게 보내는 글 경인연 與金幼道 庚寅
김유도에게 보내는 글 與金幼道

녹문집 제4권
서 書
이원명에게 보내는글 與李原明
홍양지에게 답하는 글 병진년 1월 答洪養之 丙辰正月
홍양지에게 답하는 글 答洪養之
이의보에게 보내는 글 정사년 3월 與李毅甫 丁巳三月
박사수에게 답하는 글 임신년 答朴士洙 壬申
김중척에게 답하는 글 갑자년 1월 答金仲陟 甲子正月
김중척에게 답하는 글 정축년 答金仲陟 丁丑
김중척에게 답하는 글 경인년 12월 答金仲陟 庚寅十二月
김중척에게 답하는 글 신묘년 봄 答金仲陟 辛卯春
송시해에게 답하는 글 答宋時偕
송시해에게 답하는 글 答宋時偕
송시해에게 답하는 글 答宋時偕
송시해에게 답하는 글 答宋時偕
맹성백에게 답하는 글 임자년 答孟成伯 壬子
맹성백에게 답하는 글 무오년 5월 答孟成伯 戊午五月
윤중삼에게 답하는 글 答尹重三
이자야에게 답하는 글 答李子野
이수이에게 답하는 글 임오년 答李壽而 壬午
이수이에게 답하는 글 答李壽而
김군보에게 답하는 글 갑자년 1월 答金君保 甲子正月
이백눌에게 답하는 글 무술년 12월 答李伯訥 戊戌十二月
이백눌에게 답하는 글 계묘년 봄 答李伯訥 癸卯春
이백눌에게 답하는 글 答李伯訥
이백눌에게 답하는 글 을사년 2월 答李伯訥 乙巳二月
이백눌에게 답하는 글 答李伯訥
이백눌에게 답하는 글 答李伯訥
이백눌에게 답하는 글 答李伯訥
출판사 서평
■ 녹문(鹿門) 임성주(1711~1788)의 바탕은 가족

녹문 임성주(任聖周)는 함흥 판관을 지낸 노은(老隱) 임적(任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임명주(任命周), 동생 청천(靑川) 임경주(任敬周), 운호(雲湖) 임정주(任靖周), 여동생 윤지당(允摯堂)은 모두 이름난 성리학자이다. 특히나 윤지당은 여성 성리학자로, 가정에서 여성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면서도 심성을 수양하고 성리학의 이치를 터득하여 조선시대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삶을 지향하였다. 이들 가족은 모두 학문에 열정적이었고, 경사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며 서로 발전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과 내용들은 모두 각자의 문집에 잘 담겨 있다. 녹문은 성리학사에서 서경덕, 이황, 이이, 기정진, 이진상과 함께 ‘조선 성리학 6대가’로 불리지만, 난해한 문집이 번역되지 않아 연구자들의 접근이 어려웠는데 이번 번역서 출간을 계기로 그에 대한 연구가 심도 있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임정주는 청산 현감(靑山縣監)으로 재직하던 1794년에서 1796년 사이에 부친의 《노은집(老隱集)》, 임경주의 《청천자고(靑川子稿)》, 임성주의《녹문집》, 여류문인인 누이의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를 간행하여 가족들의 유문을 정리하였다. 임정주의 문집 또한 그의 사후에 《운호집(雲湖集)》으로 간행되었는데, 한 집안에서 이렇듯 많은 문집이 간행된 사실은 놀랍고 대단한 일이라 하겠다.
녹문은 1727년 17세 때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는데, 과거(科擧)보다는 위기(爲己)의 학문을 닦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평생 도암을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로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주위의 청을 뿌리칠 수 없어 22세인 1733년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귀신(鬼神)에 대한 대책문〉으로 합격하였다.
녹문의 관직 활동은 크게 세자(世子)의 시강(侍講)과 지방 관리, 두 가지로 구분된다. 사도세자(思悼世子) 및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세자 시절의 교육을 맡았는데, 처음 1750년에 사도세자의 익위사 세마가 되었다. 그 뒤 1762년에 사도세자가 죽고 세손(世孫)이 세자로 책봉됨에 따라 녹문은 다시 동궁을 보위하는 직책을 제수받았다. 당시 대부분의 대신들이 번갈아 가며 녹문의 경학(經學)과 예학(禮學)과 학행(學行)이 뛰어난 것으로 천거하자, 영조가 세손을 교육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리고 녹문은 대부분 지방관으로 벼슬 생활을 하였는데, 1754년 가을에 임실 현감(任實縣監)으로 부임하여 정사를 돌보면서 보민청(補民廳)을 설치하여 난민(難民) 구호에 힘쓰고, 군자당(君子堂)을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풍속을 교화함으로써 학풍을 진작시켰다. 1756년에 둘째 형이 죽고 다음해에 셋째 형이 잇따라 죽자 녹문은 1758년에 공주의 녹문동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힘썼다.
이후 여러 벼슬을 지내고, 1774년(영조50) 녹문동으로 돌아와 성학(聖學)에 몰두하다가 1782년 봄에 온 집안이, 여동생 임윤지당(任允摯堂)이 있는 원주(原州)의 산호(山湖)로 이사해 지냈다. 그리고 5년 뒤 다시 녹문동으로 돌아와 1788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후기를 살며 사유하고 탐구한 녹문의 사상과 철학은 문집인 《녹문집》에 실려 전하는데, 이를 통해 조선후기 성리학사에서 그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 장기간 진행된 호락논쟁을 정리하다
녹문이 살았던 시기의 정치?사회적 주요 특징을 정리하면, 예론(禮論)을 중심으로 한 당쟁의 격화, 호락논쟁의 전개, 실학의 형성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은 녹문의 생애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호락논쟁은 그의 철학적 문제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호락논쟁이란 무엇인가? 처음 이 논쟁은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발생하였다. 한원진(韓元震)은 인물성(人物性)의 이(異)를 주장하고, 이간(李柬)은 인물성(人物性)의 동(同)을 주장하였다. 권상하는 한원진의 이론(異論)을 지지했으므로 이간은 상하·한원진을 상대로 논변하였다.
인물성 동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낙하(洛下 : 지금의 서울 지방)에 살고 있었으므로 낙학(洛學) 또는 낙론(洛論)이라 불리게 되었고, 한원진의 인물성 이론에 찬동하는 사람들은 모두 호서(湖西 : 지금의 충청도 지방)에 살고 있었으므로 호학(湖學) 또는 호론(湖論)이라 칭하게 되었다.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주장하는 낙론은 대개 《중용》 경(經) 1장의 주희(朱熹) 주(註)의
“사람과 물(物)이 각각 그 부여된 바의 이(理)를 얻어서 건순오상(健順五常)의 덕(德)이 되었다.”에
근거해 인과 물이 모두 균등하게 오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호론은 대개 《맹자》 생지위성장(生之謂性章) 주의
“이(理)로써 말하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품수(?受)가 어찌 물(物)이 얻은 바가 전(全)하리오?”에
근거해 사람은 오상의 온전함을 얻었지만 물(物)은 오상의 온전함을 얻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위의 두 구절뿐만이 아니고 인물성의 동이에 관해 주희는 여러 군데에서 어떤 때에는 인물성의 동을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인물성의 이를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속한 많은 학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깊이 있게 진행하였는데, 이러한 호락논쟁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이가 임성주이다. 이 논쟁은 그 자체로도 매우 철학적이면서 사회정치적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현대의 학자들로부터 그다지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 독자적인 연구 끝에 인물성상이론으로 전환하다
녹문은, 성은 본래 하나이므로 기질지성(氣質之性)이 곧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고 보고 기질지성을 해명하는 데에 노력하였다. 녹문은 이(理)의 보편성만을 본성이라고 하고 현실의 구체적인 사물의 성을 기질지성이라고 하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서로 분리되며, 현실의 구체적인 사물과 분리된 본연지성은 공허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에 녹문은 ‘인물성동론’을 주장했던 초기의 관점을 버리고 독자적인 연구를 진행한 뒤 ‘인물성상이론’으로 전환한다.

■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다
《녹문집》에는 예론에 대한 많은 의론이 실려 있다. 자세히 보면 녹문은 철저히 경전의 고증에 근거하여 자신의 예론을 주장하였다. 녹문은 소론(少論)의 중심 인물인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의 황극탕평설(皇極蕩平說)을 비판하였고, 또한 노론의 거두인 송시열과 한원진의 예론을 비판하였다.
녹문이 활동하던 당시 조정에는 예론을 중심으로 당파 간에 매우 살벌하고 날카로운 대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1779년(정조3)에 정언 이양재(李亮載)가 녹문을 탄핵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정조는 근거가 없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아 당쟁의 화를 입지 않았다. 녹문이 당쟁의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순수한 학문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편견에 치우치거나 정치적 술수나 목적을 위하여 문장을 견강부회하였다면 한 번쯤 화를 당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 《녹문집》의 구성과 내용
《녹문집》번역서는 모두 7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제1책과 제2책은 서(書), 제3책은 서(書)와 잡저(雜著)인 심경(心經), 소학(小學)에 대한 경의(經義), 제4책은 잡저로 논어(論語), 중용(中庸), 주역(周易), 대학(大學) 등에 대한 경의(經義), 제5책은 잡저인 한천어록(寒泉語錄), 옥류강록(玉溜講錄), 서연강의(書筵講義), 녹려잡지(鹿廬雜識), 산록(散錄)과 서(序), 기(記), 제6책은 제발(題跋), 명(銘), 잠(箴), 찬(贊), 제문(祭文), 애사(哀辭), 제7책은 묘지명(墓誌銘), 행장(行狀), 시(詩), 부록(附錄)이 실린다.
이번에 발간된 제1책과 제2책은 서간(書簡)만 수록되어 있다. 《녹문집》전체로 볼 때 편지글이 300편 이상으로 많은 분량을차지한다. 일반적인 문집의 체제에서는 시(詩)가 가장 앞에 수록되지만 저자는 시를 여기(餘技)로 여겨 힘을 쏟지 않았고 작품 수도 많지 않기 때문에 시를 문집 뒷부분에 수록하고,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 학문적 논쟁을 다룬 서간을 문집 앞머리에 수록한 것이 특이점이라 하겠다. 1책의 〈미호 김공에게 보내는 글 (與渼湖金公)〉등을 보면 임성주가 주장한 이기론, 심성론, 인물성동이론을 살필 수 있고, 2책의 〈김백고에게 답하는 글 (答金伯高)〉,〈이백눌에게 답하는 글 (答李伯訥)〉등에서는 녹문이 예론에 대해 논한 것을 볼 수 있다.

■ 《녹문집》번역의 의의
임성주의 철학은 조선 성리학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녹문 철학을 부분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그쳤기 때문에 그 학문적 의미와 유학사적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다. 임성주가 성리학사의 우뚝 솟은 위치에 있었음에도 이제껏 그에 대한 문집이 제대로 번역된 적이 없었다. 이 책은 최초로 임성주의 문집을 완역한다는 점에서 일반 독자나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녹문집》 번역본의 출판을 계기로 임성주의 철학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 조선 성리학 연구의 저변이 확대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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