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국왕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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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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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32319094
쪽수 : 304쪽
정재훈  |  현암사  |  2018년 0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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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저자 소개
정재훈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마쳤다. 조선 전기에 유교정치사상이 어떻게 이해, 수용되고 자기화하였는지를 검토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의 사상과 문화의 정체성과 특성, 동아시아에서의 위상 등에 관심이 많다. 현재 경북대학교 사학과에서 가르치고 있다. 지은 책은 『조선전기 유교정치사상연구』(태학사), 『조선시대의 학파와 사상』(신구문화사), 『조선의 국왕과 의례』(지식산업사), 『영조의 독서와 학문』(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과 다수의 공저가 있으며, 번역서로는 『동호문답』(아카넷), 『용헌집』(한국고전번역원), 『동사』(소명출판, 공역)가 있다. 이 밖에 「18세기 연행과 정조(正祖)」 등 다수의 논문도 있다.
목 차
머리말 서론_국왕과 상징 1부 국왕의 시공간적 좌표 1. ‘왕’ 제도의 역사적 변천 1) 중국에서의 변천 2) 한국에서의 변천 2. 조선시대 동서양 ‘왕’의 상징 1) 조선 2) 명과 청 3) 유럽 2부 ‘왕’의 사상적 기반과 상징 1. 원시 신앙 2. 유교 1) 성인(聖人)을 목표로 공부하는 국왕 - 경연(經筵) 2) 국가 의례의 중심으로서 국왕 - 의례(儀禮) 3. 불교 4. 도교 3부 하늘〔天〕?땅〔地〕과 국왕의 상징 1. 천문 역법의 제왕학과 국왕 2. 천변재이(天變災異)와 국왕 3. 궁궐에 표현된 하늘과 땅 4. 땅과 곡식을 관장하는 국왕 - 사직제(社稷祭) 5. 농업의 모범과 국왕 - 선농제(先農祭)와 친경례(親耕禮) 4부 사람〔人〕과 국왕의 상징 1. 왕통(王統)의 계승자 1) 왕의 초상, 어진(御眞) 2) 왕의 신주(神主), 종묘(宗廟) 3) 왕의 족보, 『선원록(璿源錄)』 2. 도통(道統)의 담지자 1) 성학(聖}學)의 수련, 서연(書筵) 2) 성학의 실천, 조선의 제왕학(帝王學) 3. 치통(治統)의 주체 1) 군대와 관료의 수장 2) 외교와 교화의 주체 3) 민본 실현의 주체 5부 의식주와 국왕의 상징 1. 국왕의 복식 2. 국왕의 음식 3. 궁궐 건축 맺는말 참고 문헌
출판사 서평
조선의 왕실 문화를 상징성의 측면에서 탐색한 ‘왕실문화총서’의 첫 책!! 사상적 측면과 천지인(天地人)적 관점, 의식주로 살펴본 국왕의 상징! 조선시대 국왕과 왕실 문화를 상징성의 측면에서 탐색한 왕실문화총서(전 7권) 첫 권이 나왔다. 이번에 나온 첫 책에서는 ‘왕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바탕으로 하여 왕권과 그 상징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 성과를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서술했다. 국권을 소유한 절대적인 존재였던 국왕은 다양한 형태의 상징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었다. 이 책은 국왕을 표현하는 유형과 무형의 상징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그 상징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분석했다. 그러나 이러한 왕의 상징이라는 것도 국왕을 떠받치는 백성과 함께 존재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이 책은 성리학을 포함한 원시 신앙, 불교, 도교 등의 사상적인 측면, 천지인의 관점, 의식주의 측면에서 드러나는 국왕의 상징을 깊이 있게 천착하는 한편 백성과의 관계에서 국왕에게 필요했던 최고의 상징은 과연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유형과 무형의 상징 이 책에서 다루는 왕의 상징은 구상화된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왕이라는 상징은 구상화된 어떤 것에 의해서도 표현되지만 구상으로 표현되지 않아도 왕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기록화에서 국왕은 표현되지 않는 존재였다. 국왕의 신체를 직접 그리지 않는 것 자체가 국왕에 대한 존엄을 표시하는 방법이었고, 비어 있는 의자에 국왕을 그리지 않음이 곧 왕의 상징이었다. 뿐만 아니라 무형의 것에도 왕의 상징을 상정해볼 수 있다. 왕도(王道) 정치가 조선시대의 국왕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면 ‘왕도 정치’ 역시 왕의 상징이며, 이와 비슷한 ‘민본(民本)’ 역시 왕의 상징이었다. 왕통(王統)과 도통(道統)의 일치를 구현하는 성인 군주를 드러내는 ‘군사(君師)’라는 용어 역시 조선시대 국왕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단순하게 구상화되고 외형화된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왕의 상징은 왕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국왕이라고 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 가운데는 구체화된 것만이 아니라 무형의 것도 왕의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교, 원시신앙, 불교, 도교에서 유래한 상징 조선시대 국왕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사상은 유교 사상, 특히 성리학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국왕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어진 임금’이라는 이미지 역시 성리학에서 유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의 국왕에게 최고의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은 ‘성인(聖人) 국왕’이었으며 신하들은 국왕에게 끊임없이 성인이 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성리학 사상이 국왕을 설명하고 수식(修飾)하는 사상의 전부였을까? 고대부터 최고 지도자는 하늘로부터 왔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왔다. 이러한 관념이 유교사상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교 사상에 내재되어 있던 이 관념조차도 거슬러 올라가면 원시시대에 하늘을 신성시하고 이로부터 최고의 권력이 유래하였던 데서 나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단 사상으로 배척받았던 불교적인 장식이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고, 도교적인 요소도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국왕이 살았던 궁궐에서도 가장 중요한 정전(正殿)에서 국왕이 앉았던 어좌(御座)의 윗부분에는 당가(唐家)가 있는데, 이는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최고의 장식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당가는 불교에서 불상을 모신 법당의 닫집과 매우 유사한 형식으로 최고 지도자인 국왕에게 미친 불교적인 양식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도교도 국왕을 수식하는 상징에 영향을 주었다. 궁궐을 장식했던 것 가운데 어좌 뒤편에 있던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이나 궁궐의 많은 신수(神獸) 등은 도교의 영향을 읽을 수 있는 증거들이다. 그리고 현재는 남아 있지 않지만, 궁궐의 벽을 장식하였던 신선 그림 역시 불로장생을 염원한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천지인(天地人)’과 연관된 왕의 상징 왕(王)이라는 글자 자체가 하늘과 땅, 사람을 연결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왕은 하늘의 아들, 곧 천자(天子)로 인식되었다. 물론 왕은 그보다 한등급 위인 (중국) 황제가 하늘과 연결되는 것에 비해서는 그 강도가 좀 약했다. 유교의 등급에서는 천자만이 하늘과 직접 연결되어 천지에 제사할 수 있고, 제후에 해당하는 왕은 특정 지역의 산천에 제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조선시대 국왕이 스스로를 제후인 왕으로서만 인정했다면 하늘에 제사 지낼 수 없었을 테지만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하늘에 대한 제사, 곧 제천의례(祭天儀禮)가 거행되었고, 하늘과 연결되어 국왕을 강조하는 의식과 행사가 이루어졌다. 물론 제천의례가 조선시대 내내 거행된 것은 아니다. 하늘과의 연결성 역시 전면에 늘 부각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은 하늘의 아들이라는 의식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조선시대에 국왕이 하늘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고가 있었기에 하늘의 변화를 읽어내는 천문 역법에 대한 관심 역시 조선 초부터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제작, 서운관(書雲觀)을 관상감(觀象監)으로 개편, 천문 관측 기구의 제작과 운영, 달력의 편찬 등을 들 수 있다. 천문역법(天文曆法)을 통해 하늘의 운행과 질서를 파악하는 것이 조선시대 국왕의 제왕학이라면 천재지변(天災地變)은 하늘에서 내려온 경고였다. 원래 유학에서는 하늘과 사람은 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에 입각하여 자연의 현상과 사람을 연결시켰던 것이다. 재이(災異)가 발생했을 때 국왕은은 궁궐의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였다. 그러나 국왕에 대한 경고라고 여긴 재이에 대해 국왕으로서는 그런 소극적인 대책만으로는 그 해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국왕은 이와 함께 적극적인 재이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가뭄에 대한 기우제(祈雨祭), 또는 계속적인 비에 대한 기청제(祈淸祭), 혹은 눈을 바라는 기설제(祈雪祭) 등의 기후 의례였다. 다음으로 왕은 땅과 곡식을 관장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종사(宗社)가 왕조나 국가를 상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직은 종묘와 더불어 조선왕조와 국왕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데, 백성은 토지를 기반으로 그곳에서 나오는 곡식으로 살아가므로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곳인 사직은 국가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국왕은 반드시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사직제)를 지내서 백성들의 민생을 해결해주는 토지와 곡식에 대해 보답할 책임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왕은 실제로 농사를 짓는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된 의례로는 선농제(先農祭)가 있었다. 선농제는 선농단(先農壇)에서 시행하는 제례이기는 하지만 제례보다는 제례를 행한 이후에 직접 농사짓기를 시행하는 친경례(親耕禮)도 중요시되었다. 종묘는 사직과 함께 국왕과 왕권, 혹은 국가를 상징한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 새로운 수도인 한양을 건설할 때도 궁궐보다 먼저 만든 것이 종묘와 사직이었다. 종묘와 사직, 줄여서 종사가 왕을 대표로 하는 국가를 상징하였는데 그 가운데 종묘는 바로 선왕들의 위패를 모심으로써 국왕의 인적인 부분을 더욱 잘 드러내는 곳이다. 사람과 연관된 상징으로 보면 국왕이라는 존재는 혈연적으로는 왕통의 계승자이지만 동시에 도통(道統)의 계승자로서 성인(聖人)의 학문인 성학(聖學)을 이은 존재였다. 그러므로 성학의 수련을 위한 세자나 세손의 교육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살펴본 것은 의식주와 관련된 상징이다. 국왕은 의식주의 모든 영역에서 그 상징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존재였다. 국왕의 모든 일상 속에는 일반인과 달리 구분되는 명확한 것들이 많았다. 이러한 구체적인 것에는 모두 국왕을 빛나게 하는 상징들이 들어가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국왕에게 검약과 절제를 요청하는 것들도 있었다. 국왕의 상징에는 국왕에 대한 존엄과 동시에 국왕에 대한 기대도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왕의 상징은 백성의 삶이 안정될 때 의미 있는 것 국왕의 상징이 갖는 의의는, 어떤 형태로 구상화하여 드러냄으로써 국왕을 수식(修飾)하고 장식하며, 왕을 대신하고 높이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상징이 아무리 훌륭하고 밈이 좋아도, 국왕의 상징에 포함되어 있는 무형의 상징성이 쇠락하면 구상화된 상징 역시 그 의미가 퇴락될 수밖에 없다. 국왕의 상징이 상징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그 무형의 내용적 의미가 허구화될 때 상징으로 대표되었던 국왕의 존재는 무의해지며, 왕조 역시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역사적인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국왕의 상징에서 무형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백성의 삶으로부터 나와야만 했다. 백성의 삶의 안정, 이것이 국왕이 추구할 최고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왕실문화총서(전 7권) 조선 왕실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왕실 문화의 본질과 형식이 잘 드러나는 상징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시리즈는 왕실 문화의 핵심 주체인 국왕과 왕실을 상징화하는 작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천착하여 이뤄낸 연구 성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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