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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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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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67220259
쪽수 : 752쪽
리처드 폰 글란  |  소와당  |  2019년 0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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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세계사가 말해주는 시장 자율 경제와 국가 개입 경제의 한 판 승부 미국 인문학의 가장 현대적인 트랜드를 주도하고 있는 이른바 캘리포니아 학파의 대표적 컨텐츠가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캘리포니아 학파란 캘리포니아 대학교 경제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세계사를 기획하는 학문적 경향을 일컫는다. 핵심은 서양 우월주의에 반대하며, 세계사에서 동양의 위치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에 있다. 즉 서양의 시장 중심 경제가 중국의 국가 개입 경제를 능가했던 시기는 세계사적으로 매우 짧은 기간에 불과하며, 그 수명 또한 이미 다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서양경제사와 중국경제사의 비교가 캘리포니아 학파의 입장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주제다. 이번에 한국어로 번역된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는 이와 같은 새로운 세계사의 시각에서 중국 경제 통사를 재해석한 기념비적 학술서다. 영미권은 물론 중국 및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 학계를 통틀어서 실로 반세기반에 출현한 중국경제사 통사라는 학술적 의의도 적지 않다. 이 책에서 시도하는 새로운 중국경제사 해석은 중국사의 재평가는 물론, 세계 경제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에도 큰 밑거름이 될 것이다.
저자 소개
저자 : 리처드 폰 글란 캘리포니아 대학교(UCLA) 역사학과 교수. 1987년부터 중국 사 및 세계사를 강의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전근대 중국 사회경제사다. 동아시아 해양사, 비교경제사, 글로벌 경제사 관련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특히 중국 화폐 시스템과 아시아 지역 화폐 유통의 관계를 세계사적 차원에서 연구하고 있다. 중국사 관련 주요 저서로는 《부(富)의 원천: 중국의 화폐와 화폐 정책, 1000-1700년(Fountain of Fortune: Money and Monetary Policy in China, 1000-1700)》(1996), 《사도(邪道): 중국 종교 문화에서 선신과 악신(The Sinister Way: The Divine and the Demonic in Chinese Religious Culture)》(2004)이 있으며, 공저로 세계사 교재 《문명의 십자로와 문화: 세계 민족의 역사(Crossroads and Cultures: A History of the World Peoples)》(2012)가 있다. 이외에도 중국경제사 관련 많은 논문과 저서들을 발표한 바 있다. 역자 : 류형식 서강대학교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공부했다. (주)문학사상사, (주)사계절출판사 편집부에서 근무했으며 (주)소와당 대표를 역임하였다. 현재 세계사연구소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중앙유라시아 세계사》, 《실크로드_7개의 도시》, 《고대 지중해 세계사》, 《세계사를 바꾼 화산 탐보라》, 《케임브리지 세계사 콘사이스》 등이 있다.
목 차
그림 목록 8 지도 목록 10 표 목록 12 옮긴이의 말 17 감사의 말 20 서론 22 CHAPTER 1 청동기 시대의 경제(기원전 1045~707) 39 CHAPTER 2 도시 국가에서 전제 군주정으로(기원전 707~250) 97 CHAPTER 3 세계 제국의 경제적 토대(기원전 250~81) 165 CHAPTER 4 호족 사회와 장원 경제(기원전 81~기원후 485) 241 CHAPTER 5 정주-유목의 통합과 제국의 재통일(485~755) 309 CHAPTER 6 당송변혁기의 경제 혁신(755~1127) 377 CHAPTER 7 활짝 꽃피운 강남 경제(1127~1550) 453 CHAPTER 8 시장 경제의 성숙(1550~1800) 521 CHAPTER 9 국내의 위기와 외부의 도전(1800~1900) 607
출판사 서평
이 책은 세 가지 차원에서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달성했다. 거대한 지역 범위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냈다는 점 에서 거시적 차원, 무려 3000년의 흐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장기 지속적 차원, 해당 분야의 연구사를 총정리 했다는 점에서 이론 종합 차원이 그 세 가지다. 모두 중국과 같은 유구한 문명과 그 경제의 역사를 보여주기 에는 매우 적절한 방식들이지만 최근에는 이런 성과를 흔히 보기 어려웠다(혹은 그리 인기 있는 방식이 아니 라서 그렇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차원 가운데 한 가지만 성공한다고 해도 학자로서는 행운이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세 가지 차원을 모두 달성했다면 이는 영웅적 업적이라 일컫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방대한 범위의 역사 자료들과 현재 진행중인 역사학의 쟁점들을 모두 재검토하고, 이를 종합하여 일 관된 하나의 통사로 재구성한 리처드 폰 글란의 업적에 대해서는, 학문적 걸작이라는 평이 결코 아깝지 않다 . - Kent G. Deng, 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 이 정도 수준의 중국경제사는 이제까지 없었다. 앞으로 누구라도 시도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에서 는 영어권, 중국어권, 일본어권, 그리고 약간의 프랑스어권 자료를 망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독성 이 뛰어나 일반 독자들도 충분히 접근할 수 있는 책이다. 머지않아 세계 최대 경제권으로 성장할 중국 경제의 과거를, 그 역사의 뼈대를, 아마 이 책이 아니었다면 접촉하기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 - Kenneth Pomeranz, University of Chicago -- 주요 내용 CHAPTER 1 청동기 시대의 경제(기원전 1045~707) 서주(기원전 1045-770)의 경제는 왕실을 포함한 대귀족 가문이 토지와 농업 노동에 기생하는 경제였다. 지 배층의 권리는 세습되는 것이었다. 재산이나 소득에 부과되는 세금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왕은 이론적으로 는 관리를 임명하면서 부가적으로 여러 재산을 하사하는 관행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행해지지 못했고, 왕실의 힘이 약해질수록 현실적으로 그럴 능력이 없었다. 토지는 민간 계약에 의해 소유권이 바뀔 수 있었지 만, 우리가 “돈”이라고 부를 만한 단순명확한 교환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복잡한 의례 과정을 거쳐 매매가 이루어졌는데, 여러 잠재적인 구매자들이 경쟁하는 공개적인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서주에서는 돈 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개오지조개가 가끔 가치 단위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교환수단으로 기능하지는 않았다. 의례에서 소용되는 다른 예물이 가졌던 가치만큼 개오지조개도 그 정도의 가치를 지녔을 따름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국가는 직할령을 넘어서서는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것이 지하 경제의 존 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물물교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개입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국가와 경제는 서로 협력하면서 성장해 갔다. CHAPTER 2 도시 국가에서 전제 군주정으로(기원전 707~250) 주나라 중앙 권력이 약화된 이후, 특히 기원전 6세기 긴장이 강화된 이후, 각국의 핵심 문제는 전쟁 수행 능력 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소규모 도시국가였고, 배후의 시골에 대해서는 영 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철기가 확산되면서 정치 권력은 점차 강화되었다. 보병 중심의 대 규모 군대는 전차 기반의 소수 귀족 군대에 비해 우위를 점했다. 뒤이어 농사를 비롯하여 민간에 활용되는 철 기도 보급되었다. 또한 예전보다 많은 잉여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는 신기술도 뒤따랐다. 이 모든 것들 덕분에 도시국가들은 더 많은 토지를 개척할 수 있었다. 세금을 내면 재산권을 인정해 주었고, 과거 유목민을 포함해 서 이주를 장려하였으며, 관개시설과 홍수 방지 시설을 건설하였다. 예전에 변방에 있던 국가는 새로운 시골 개척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런 곳에서는 도시 귀족 계층이 별로 없었기때문에 공산품에 대해서 도 더 강한 통제를 할 수 있었고, 상거래에도 개입할 수 있었다. CHAPTER 3 세계 제국의 경제적 토대(기원전 250~81) 진나라는 시골 농민들을 모아서 이러한 경쟁에 뛰어들었다. 진나라는 국가의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지방 호 족, 고리대금업자, 부유한 상인들로부터, 그리고 자연 재해로부터 농민을 보호해 주었다. 그 뒤를 이은 한나라 는 흉노와의 오랜 전쟁 때문에 강한 재정 압박에 시달렸다. 그래서 진나라와 비슷한 농업 정책을 따랐지만, 상 업과 산업에 대해서도 더 강력한 통제를 시도했다. 저자는 이러한 특성을 “중상주의 재정 국가(mercantilist fiscal state)”라고 일컬었다.(p. 223) 한편으로는 효율성을 높여 국내 상거래를 권장하면서(도로를 건설하고, 도량형을 통일하며, 통화의 안정을 꾀하는 등) 다른 한편으로는 최대한 상거래에서 세금을 거두려는 방향이 었다. 여기서도 채택된 정책들이 곧 국가가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CHAPTER 4 호족 사회와 장원 경제(기원전 81~기원후 485)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폰 글란 또한 후한과 분열 시기를 경제가 침체된 시기로 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국가에서 신분을 보장해준 관료들이 새로운 장원 경제로 나아가는 기반이 되었다. 장원 경제란 부와 권력이 대토지 소유자인 호족의 손에 좌우되는 체제였다. 5-6세기 남부 지역의 경제가 부활했지만, 이것이 왕조의 강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경제 성장으로 호족 세력만 강해졌을 뿐 국가의 힘은 갈수록 약화되었기 때문이 다. 이와 달리 이방인이 통치하던 북방에서는 새로운 제도를 통해 매우 훌륭한 군사 체제를 갖추었 다. 이는 6 세기 말에 중국을 다시 통일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CHAPTER 5 정주-유목의 통합과 제국의 재통일(485~755) 저자가 “호한 융합”이라고 일컬었던, 새로운 군사 시스템에 기반을 둔 체제가 바로 수나라와 당나라였다. 이 들이 직면한 정치-경제의 도전은 과거 진나라와 한나라가 직면했던 도전과 비슷한 것이었다. 특히 지방 호족 의 세력을 억제하고 농민의 생계를 안정화시키는 동시에 그로부터 막대한 군대의 비용을 충분히 뽑아내는 것 이었다. 당나라는 한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중원과 양자강 유역 같은 세금 수입 지역과 수도 및 국경 같은 재 정 지출 지역”을 엄격하게 구분하였다.(344쪽) 수나라와 당나라는 모두 국경과 수도에서의 소비를 위해 공급 을 안정화하고 수입을 끌어모으는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물질적 제도적 장치를 확장하였다. 대운하를 건설하고 최초로 전국적 차원에서 재난 대비 창고를 설치하였다. 이를 시행하는 것은 전국적으로 획일적이지 않았 다. 북중국에서는 균전제가 충실히 실행되고 있었지만 남중국에서는 균전제를 실시하지 않았다. 남중국에서 는 관개시설을 조성하는 데 막대한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지역에서 시기별로 다양한 제도가 시 행되었다. CHAPTER 6 당송변혁기의 경제 혁신(755~1127) 혁명적이었던 것은 당나라 후기와 송나라 시기 중앙 정부의 강남 의존도가 극적으로 상승했다는 데 있다. 이 는 대체로 중당 시기 안록산의 난 때문에 비롯된 일이다. 황폐화된 북중국으로부터 인구가 대거 남중국으 로 이동했고, 동시에 홍수 방지, 관개시설, 교통 기반 시설 등에 대규고 정부 투자가 필요했다. 남중국은 농 업 잠재력이 높았고, 수로 교통의 가능성이 훨씬 좋아서, 경제적 다양성, 상업화, 생산성 향상에 유리한 조건 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다양한 명목으로 세금을 부과하였다. 기술 변화도 물론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 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존의 지식을 더욱 풍부하게 적용한 결과일 뿐 새로운 발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 다.(448쪽) CHAPTER 7 활짝 꽃피운 강남 경제(1127~1550) 이 점을 강조하면서 저자는 마크 엘빈의 중세 혁명에 반대하고 있다. 동시에 그러한 혁명의 필요성이 점차 없 어졌다는 점에 대해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또한 북송과 남송의 세금이 과도해서 민생이 피폐했다는 흔히 저 지르는 실수도 저는 적절히 피해가고 있다.(469-70쪽) 여기서 기존의 상투적인 줄거리와는 다른 두 가지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중국사에서 가장 부유했던 시기로 750년-1350년 혹은 심지어 1550년까지를 꼽는데, 당시가 특별히 창 의적인 시대였고 뒤이어 경기 침체 혹은 몰락이 이어진 것이 아니라, 비교적 꾸준하게 성장세를 거듭했던 시 기였다는 주장이다. 심지어 몽골의 정복 시기도, 북중국과 사천 지역에서는 많은 지역이 명백한 재앙을 겪었 던 것이 사실이지만, 심지어 그 때도 동부와 남동부 지역에서는 기술의 확산과 시장의 발전, 인구 성장이 꾸준 히 이어졌다.(pp. 499-500, 507) 둘째, 상대적으로 내부적인 논점이기는 하지만, 저자는 수많은 논란을 되돌려, 11세기 왕안석의 반대파들까지 나아간다. 그들은 송나라가 경제에 너무 과도하게 개입했고, 너무 세금을 쥐어짜려고 했다고 비판을 했었다. 그래서 결국 사회경제적 기반이 허물어졌다는 주장이었다. 1250년대 최악의 재정 상태에서조차 군대를 먹여 살리는 문제는 일시적인 곤란을 겪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저자는 반대로 왕안석 신법의 성공을 주 장했다. 신법은 부담을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일부 지역으로 국한시켰지만, 이것만으로는 왕조를 구하지 못했 다. 신유학 대신 우리가 들은 이야기는 군사적 패배였다. CHAPTER 8 시장 경제의 성숙(1550~1800) 1550년대 이후 상업의 핵심적 양상은 폰 글란이 보여주었듯이 중원의 회복과 그다지 관련이 없고(과거에는 주로 그러했지만) 다른 지역의 상업화 증대와 깊은 관련이 있다.(p. 524) 예속 노동은 대부분 사라졌다. 상거 래에 거의 연결되지 않았던 지역들도 시장 네트워크에 편입되었으며(정기 시장이 크게 증가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시장을 염두에 둔 시골의 수공업품(특히 면직물 생산)이 전국의 상당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가문 기업 이 약간의 공동 소유 재산을 기반으로 활동을 벌이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이 늘어났고, 새로운 조직들이 도시의 경제를 상업과 생산 양 측면에서 끌어 올렸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나중에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대규모로 은이 수입되었다. 이는 부족했던 명나라의 화폐 주조 정책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재정 정책 또한 여전히 왕조 초기 홍무제가 실시했던 정책에 묶여 있어서 시장의 성장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 이는 왕 조의 힘을 약화시켜 농민 반란을 초래했다. 당시 북반구를 덮쳤던 기후 악화와 흉년도 중요한 원인이었다.(p. 550) 마침내 만주족이 쳐들어왔다. 만주족은 16세기 은의 활성화로 유리한 이득을 차지했었고, 17세기 초에 신생국을 건설했다. 만주족의 일상 생활은 당시 중국인에 비해서 화폐경제에 편입되는 정도가 훨씬 약했음에 도 불구하고, 만주족은 은으로 많은 이득을 취했다. 명나라는 상업화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고, 화폐 경제의 발전 속도를 느리게 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발전하는 경제의 희생양이 되었다. 폰 글란은 만주족이 “정부가 식량을 책임지는 국가 체제(provisioning state)”(p. 553)를 채택했다고 본다. 국 민의 생계 유지에 국가 정책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청나라는 명나라를 닮았다. 명나라도 잠 재적 성장보다는 식량 안정화를 추구했다. 그러나 청나라의 방법은 민간에게 훨씬 더 많은 자율성을 주는 방 식이었다. 이는 식량 공급과 성장 양 측면에서 모두 명나라보다는 유리한 방식이었다. 군사적 확장이 최고조 에 달했을 때조차 청나라 정부는 이전 왕조에 비해 국내총생산에서 거둬가는 비중이 훨씬 더 낮았다. 같은 시 기 전근대 유럽 국가들에 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군비 지출도 더 적었다. 정부가 물관리나 기근 구제에 상당 한 재정을 투입했고, 특히 취약한 지역을 중심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화폐 공급을 실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상당한 권한을 지역에 넘겨주었고, 특히 부유한 지역일수록 자율성이 더 컸다 .폰 글란의 설명에 따르면 중 앙 정부의 마을 단위 개입은 최소한에 머물렀다.(p. 555) 결과적으로 청나라의 조치는 학들이 말하는 이 른바 “스미스주의적 성장”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민간 경제 활동이 확장되고, 노동의 분화가 세분화되며, 효 율성이 증대하는 것이다. 중국 인구는 1680년에서 1850년 사이 세 배로 늘어났다. 그럼에도 맬더스의 위기는 없었다. 그러나 1720년대와 1730년대의 적극적 개입 정책을 실시한 뒤로는 국가는 경제 개입으로부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세금 수입을 법령으로 못박아 고정화시켰다. 그 결과 갈수록 개입정책을 실시한 재정이 부 족했다. 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었다. CHAPTER 9 국내의 위기와 외부의 도전(1800~1900) 1800년 전후의 중국 경제 전반에 관한 다양한 접근을 요약 정리한 뒤 저자는 19세기로 급히 넘어가서 책을 마무리한다. 19세기에 관한 내용은 매우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 워낙 문헌 자료가 많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아 편, 은, 19세기 초의 경기 침체에 대한 그의 설명은 특히 유용하다. 심지어 위기의 시대, 외세의 손해배상에 시 달렸던 시기에조차 중국 경제 네트워크의 생명력이 살아있었던 사실을 강조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저자는 모든 것을 앞서는 거대담론을 거부했다. 경제사에서 시장에만 배타적으로 초 점을 맞추는 것을 넘어서고자 했던 그의 관점과 아울러 이 책에서는 20세기 이전의 중국 경제사의 내재적인 사례에 접근하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나로서는 이러한 접근법을 브로델주의라고 부르고자 한다. 즉 해당 지 역 경제의 지리적 물질적 환경을 강조하면서, 급격한 변화보다는 장기지속적인 발전 과정에 주목을 하는 방 식이다. 또한 농민, 수공업자, 소규모 상인들이 경쟁 시장과 거대 상인, 원거리 교역, 국가 지원 재정 정책의 차이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방식이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서 주장하는 때때로 국가의 개입이 필요한 측면 과 아날학파의 접근법 사이의 긴장이 존재하는 것 같다. 아날학파의 접근법에서는, 비록 국가의 역할이 크게 실행되었던 때라도 그것을 간략하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Book Review by Kenneth Pomeranz. Journal of Chinese Studies No. 66 - January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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