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의 길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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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의 길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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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35665518
쪽수 : 808쪽
서인범  |  한길사  |  2018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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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저자 서인범(동국대학교 교수, 사학과)이 총 길이 2,000킬로미터에 달하는 통신사의 길을 직접 따라가며 조선시대 대일외교의 본질과 지혜를 문학적 문체로 유려하게 서술한 '역사답사기'다. 철저한 사료 조사에 현장에서 만난 많은 이와의 인터뷰, 박물관 견학 등이 더해져 역사적 진실에 최대한 근접하면서도 생생한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당시 조선이 적국 일본과 어떻게 관계를 정상화하고 각종 문제를 풀어냈는지 집중적으로 다루어, 오늘 첨예하게 대립 중인 우리와 일본의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통신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았다. 부산에서 출발해 쓰시마와 세토나이카이, 오사카와 교토를 지나, 도쿄(에도)에 도착한 뒤, 닛코를 방문하기까지 통신사가 지나간 주요 경유지 58곳을 직접 답사해 통신사 관련 저서 중에서도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여행기로서도 충실해 400여 개에 달하는 현장 사진과 도판을 싣고, 통신사가 걸은 길을 인포그래픽 형식의 지도로 만들어 보는 재미를 더했다.
저자 소개
서인범 동국대학교 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도호쿠(東北)대학교 문학부 동양사학과에서 「명대병제사 연구」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을 2,400여 개의 역주를 달아 한길사에서 출판했다. 그 후 최부의 여정을 따라 항저우에서 베이징까지 길을 떠났다. 이 여정을 글로 엮어 2012년 한길사에서 『명대의 운하길을 걷다』로 펴냈으며, ‘EBS 세계테마기행’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이후 최부의 나머지 여정인 베이징에서 압록강까지의 길이 조선시대 사행길과 겹친다는 것에 착안해 2013년 답사를 떠났다. 이 여정은 2014년 한길사에서 『연행사의 길을 가다』로 출판됐다. 조선 사신들은 중국뿐 아니라 일본으로도 갔다. 당시 일본은 한때 적국이었던 나라로 조선의 평화, 더 나아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반드시 관계 맺을 필요가 있었다. 조선시대 주요 외교사를 마무리한다는 일념으로 2017년 통신사의 길을 밟았다. 현재 동국대학교에서 동양근세사를 가르치면서 명·청시대의 중요한 기록인 『연행록』(燕行錄)을 번역하고 있다.
목 차
통신사의 길 전체 경로
답사길 전체 경로
동조궁의 잠자는 고양이 | 머리말
통신사는 누구인가

제1부 떨리는 마음으로 닻을 올리다
부산 → 하카타 구간 세부 경로
1 부산에서 만난 통신사
2 왜관의 자취는 사라지고
3 해신제를 지내며 출항의 안전을 기원하다
4 닻을 올리고 돛을 펼치다
5 물마루를 넘어 쓰시마로
6 조선과의 관계를 생명처럼 여긴 쓰시마번
7 조선인의 심성을 간파한 호슈
8 조선과 쓰시마번, 좁혀지지 않는 거리
9 원나라군의 흔적이 남은 이키시마
10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 나고야성
11 고양이의 천국 아이노시마

제2부 외해를 건너니 내해가 펼쳐지다
시모노세키 → 고베 구간 세부 경로
12 시모노세키의 격류를 거스르다
13 천혜의 양항 가미노세키
14 통신사 기록의 보고 조코관
15 시모카마가리지마의 진수성찬
16 일본 제일의 경승지 토모노우라
17 사람과 신이 공존하는 이쓰쿠시마
18 일본의 에게해 우시마도
19 산킨코타이의 거점 무로쓰
20 일본의 국보 히메지성
21 통신사의 객관을 찾아 고베를 누비다

제3부 드디어 일본 땅을 밟다
오사카 → 세키가하라, 다카쓰키 구간 세부 경로
22 바다와 육지를 연결한 오사카
23 활력 넘치는 관광명소 도톤보리
24 마지막 물길 50리
25 수로 항해의 종착지 요도천
26 백성의 피와 땀이 서린 후시미성
27 천년 고도 교토의 사찰을 둘러보다
28 니조성에서 조선 호랑이를 만나다
29 조선인의 한이 서린 이총
30 선의후리를 고집한 오미하치만의 상인들
31 가문을 지켜낸 천하의 여걸 나오토라
32 호슈의 고향 다카쓰키정
33 역사를 바꾼 세키가하라전투

제4부 내처 걷는 발걸음에 관동을 가로지르다
오가키 → 미시마 구간 세부 경로
34 배 300척을 연결한 기소천의 부교
35 성 중의 성 나고야성
36 오카자키성에서 이에야스를 만나다
37 후지카와숙에서 요시다숙까지
38 금절하에서 보여준 조선 관원의 기개
39 후지산은 일본에서 두 번째로 높다
40 건너려야 건널 수 없는 오이천
·「도카이도53차」로 보는 에도시대의 풍경
41 슨푸의 오고쇼는 건재하다
42 통신사를 감동케 한 절경 중의 절경 청견사
43 쓰나미가 요시하라숙을 밀어내다
44 통신사 대접에 최선을 다한 미시마숙

제5부 에도에 들어가 장군을 알현하다
하코네 → 닛코 구간 세부 경로
45 에도 방어의 최전선 하코네관소
46 난공불락의 오다와라성이 함락되다
47 오이소의 고려인 마을
48 요코하마의 밤을 밝히는 랜드마크타워
49 시나가와에서 관복으로 갈아입다
50 풍악을 울리며 입성한 에도성
51 장군을 알현하다
52 금빛 찬란한 닛코의 동조궁
53 장군이 사랑한 마상재
54 나라를 뒤흔든 야나가와 잇켄
55 장군은 일본국왕인가 대군인가

제6부 우여곡절 끝에 귀환하다
56 피로인의 슬픔을 누가 달래줄까
57 오사카의 원혼이 된 최천종
58 수행원의 다툼과 죽음
59 임금 앞에 복명하다

역사 해석의 간극 | 맺는말
통신사의 길에서 만난 한·중·일 118인
역사용어·역사지명 풀이 113선
표로 정리한 통신사 파견
통신사 관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목록
출판사 서평
*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 사업 선정(2018)

연행사의 길에서 이어진 통신사의 길

『통신사의 길을 가다』는 저자의 전작 『연행사의 길을 가다』(2014, 한길사)의 연장선에 있는 책이다. 연행사는 명나라와 청나라에 파견된 사신으로 조공을 바치고 조선과 중국 사이의 각종 외교 현안, 가령 압록강의 영토 문제, 왕세자 책봉 문제 등을 해결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차지한 위상을 생각하면 연행사는 굉장히 중요한 직책이었다. 그런데 이 중 상당수가 일본으로도 파견되었으니 바로 통신사다. 당시 조선이 적국 일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통신사 파견은 전적으로 일본의 요청에서 시작된 일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권력이 재편된 일본은 조선과의 관계회복을 가장 중요한 일로 꼽았다. 조선과 일본을 중계하며 먹고 살았던 쓰시마의 노력이 있긴 했지만, 무엇보다 이에야스의 국제정세 판단이 한몫했다. 그는 조선과 관계를 회복하고 문물을 교류하는 게 일본의 국익을 위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관동(關東)에 있었기 때문에 임진년의 일에 대해서 미리 알지 못했소. 지금은 히데요시의 잘못을 바로잡았소. 진실로 조선과 나와는 원한이 없소. 화친하기를 바라오.” _ 23쪽

1607년의 첫 파견 이후 200여 년간 통신사는 총 12번 일본을 다녀왔다. 일본의 요청으로 파견된 통신사지만 그들을 가볍게 대하지 않았다. 물론 중국을 대할 때보다 급을 낮춘 건 사실이지만 이는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고려했을 때 상식적인 처사였다. 조선도 일본과의 관계회복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일본이 아우의 처지로 조선과 중국에 잘 대하길 바랐을 뿐이다. 물론 일본은 늘 조선과 대등하게 대접받고 싶어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쪽이 사신 파견을 먼저 요청하는지, 호칭은 어떻게 정리하는지 등을 둘러싸고 미묘한 신경전이 끊이질 알았다. 두 국가의 이해가 부딪히는 이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통신사는 국익을 위해, 또 두 국가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부단히 애썼다.
통신사가 일본에 다녀오는 데는 최소 반년, 길게는 1년까지 걸렸다. 따라서 당시 외교는 요즘처럼 비행기를 타고 가서 장관이면 장관, 총리면 총리, 대통령이면 대통령을 만나고 오는 방식과는 개념부터 달랐다. 통신사가 길에서 막부 관료와 일본인을 수없이 만나는 일 자체가 넓게 보아 외교였다. 당시 외교를 논하며 ‘길’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저자는 통신사의 길을 따라 40일간 총 2,000킬로미터를 이동했다. 단일 학자의 통신사의 길 답사로는 최대 규모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성과도 컸다. 몇몇 박물관의 수장고에 직접 들어가 통신사 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촬영하는 역사학자로서 잊지 못할 경험도 했다. 그런 노력으로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여러 도판을 책에 실을 수 있었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도 생생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조선시대 통신사처럼 수많은 일본인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여전히 통신사를 기억하고, 통신사의 행차를 기념한 축제를 열고 있었다. 그들의 입이 아니었다면 기존 사료의 빈 곳을 생생하게 복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생생하게 복원한 통신사의 외교 여정
『통신사의 길을 가다』는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다.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는 순간부터 화려한 에도성에서 장군을 알현하는 긴장된 순간까지 한 번 읽으면 잊지 못할 통신사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 제1부 떨리는 마음으로 닻을 올리다
제1부는 부산에서 하카타까지 다룬다. 통신사는 쓰시마와 이키시마를 거쳐 일본 근해에 도달했다. 험한 바다를 건너야 했기 때문에 부산에서 해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쓰시마에서는 조선과 일본의 중재자 역할을 한 쓰시마번주를 만났다.
저자는 쓰시마번과 조선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쓰시마는 척박한 섬이었기에 선과 일본 사이에서 무역하지 않으면 도저히 생존할 수 없었다. 쓰시마번주가 조일의 관계회복을 앞장서 이끈 이유다.
그렇다고 쓰시마번이 조선에 무조건 머리를 조아린 건 아니다. 아주 당당히 요구할 건 요구하고 불만을 표할 건 불만을 표했다. 심지어 조선이 벼슬을 내리고 양식을 주었는데도 말이다. 조선은 이런 쓰시마번의 행태에 불쾌해하면서도 일본과 조선 사이에 낀 그들의 중계자적 처지를 이해해주고 마치 동생을 대하듯 어울렀다.

“쓰시마는 조선의 한 고을과 같다. 태수가 도장(圖章)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명령을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의 의리가 있다”(제8차 통신사 종사관 이방언의 기록). _ 89쪽

- 제2부 외해를 건너니 내해가 펼쳐지다
제2부는 시모노세키에서 고베(효고)까지 다룬다. 시모노세키의 격류를 지나면 일본의 내해, 즉 세토나이카이가 나온다. 통신사는 배를 타고 세토나이카이를 지나며 바닷가의 숙장들에서 휴식을 취했다. 저자는 통신사가 극진히 대접받았음을 생생히 묘사한다. 특히 일본의 유력자들이 앞다투어 통신사를 찾아왔는데, 조선인의 글과 그림이 귀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만남에서 조선은 일본을, 일본은 조선을 탐색하고자 했다. 통신사가 걷는 길 자체가 늘 외교현장이었던 것이다.

“구름이 지나가고 달이 솟으매 만경창파가 비단을 펼친 듯하다. 수많은 돛단배가 언덕 아래에 정박하고는 점점이 등을 달아 곧 하계(下界)의 별빛이 되었다. 사람이 신선이 되어 하늘을 오르는 기분이 들게 한다”(제10차 통신사 종사관 조명채의 기록). _ 212쪽

- 제3부 드디어 일본 땅을 밟다
제3부는 오사카에서 세키가하라까지 다룬다. 오사카에 도착한 통신사는 얼마간의 수로 항해를 마친 후 드디어 육로를 걷기 시작한다. 통신사는 보통 나카센도(中山道)를 따라 걸었는데, 천년 고도 교토의 번화함과 비와호(琵琶湖)의 아름다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자는 교토에서 통신사가 묵은 여러 사찰을 답사했다. 특히 교토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사찰이 많았는데, 규모가 큰 사찰이라면 대부분 통신사에 관한 기록이나 유물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중에는 이총(耳塚), 즉 왜란 당시 일본군이 벤 조선인의 귀와 코를 묻은 무덤이 있는 곳도 있었다. 당시 일본은 이총을 만들며 이에야스의 자비로움을 찬양했으니, 통신사는 이총이 있는 사찰에 묵기 거부함으로써 항의의 뜻을 밝혔다.
이후 세키가하라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를 지난 통신사는 나카센도를 벗어나 나고야로 향했다. 그 분기점에서 일본 역사의 변곡점을 몸소 느꼈으리라.

“히데요시가 일으킨 이 전쟁은 조선반도 사람들의 끈질긴 저항 때문에 패퇴로 끝났다. 이 이총은 전란으로 피해를 입은 조선 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유훈으로서 오늘에 전하고 있다”(교토 도요쿠니신사 근처의 이총 앞 안내판의 내용). _ 363쪽

- 제4부 내처 걷는 발걸음에 관동을 가로지르다
제4부는 오가키에서 미시마까지 다룬다. 저자는 통신사가 나고야부터 일본의 5대 가도(街道) 중 하나인 도카이도(東海道)를 따라 걸었음을 밝힌다. 이에야스는 권력을 잡은 이후 길을 닦기 위해 도카이도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통신사는 소나무 그늘 밑을 걸으며 시원하게 에도로 향할 수 있었다. 길에서 후지산도 볼 수 있었는데, 압도적인 크기에 감격하면서도 금강산과 비교하며 자부심을 드러낸 이가 적지 않았으니, 일본에 대한 경쟁심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물론 통신사가 늘 풍경이나 구경하며 마음 편히 이동한 것은 아니다. 아라이관소를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관소를 지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긴장되는 일이었다. 제1차 통신사는 장군에서 물러나 오고쇼(大御所)가 된 이에야스를 알현하기도 했다. 저자는 도카이도의 풍경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일본을 대표하는 우키요에 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가 그린 「도카이도53차」를 실었다.

“이에야스는 관복을 갖추고 서협당(西俠堂)에 앉았다. ……예를 끝내고 나오는데 관복을 갖추고 외당(外堂)에서 문안드리는 왜관(倭官)이 얼마인지 그 수를 셀 수 없었다. ……그의 나이는 66세였다. 형체는 장대했으며, 기력은 쇠로(衰老)하지 않았다”(제1차 통신사 정사 여우길의 기록). _ 532쪽

- 제5부 에도에 들어가 장군을 알현하다
제5부는 하코네에서 닛코까지 다룬다. 에도를 지키는 마지막 관문 하코네관소를 지난 통신사는 드디어 에도에 도착, 장군을 알현한다. 국서를 전달하고 답서를 받은 뒤 그 형식에 이상은 없는지 확인을 마칠 때까지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장군이 요청한 마상재를 공연하고, 이에야스의 사묘가 있는 닛코에 참배하는 일 모두 외교전의 연장선에 있었다.
특히 제4차 통신사가 파견되었을 때는 ‘야나가와 잇켄’(柳川一件)이 벌어졌다. 쓰시마번주가 조선과 일본의 관계회복을 위해 국서를 위작한 일이 폭로된 사건이다. 조선의 임금과 일본의 장군이 주고받는 국서의 내용에 손을 댔으니 양국에 어떤 후폭풍이 미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당시 정사 임광은 쓰시마번주가 계속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중계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판단하에 그의 위신을 높여주려 각종 요구를 수용했다. 통신사의 닛코 참배도 이런 이유에서 성사된 일이다.
저자는 그 치열하고 아슬아슬한 순간을 놓칠까 부지런히 답사를 이어갔다. 양국의 평화를 위해 노력한 통신사의 깊은 뜻을 알게 된 시간이었다.

“단청한 벽과 금칠한 기둥은 광채가 눈부셨다. 지극히 웅장하고 수려했다. 통신사는 국서를 정청에 봉안했다. 사찰이 거대해 일행이 모두 한 구내(構內)에 체재했다. 대소 수백 명이 기거했다. 잠자는 곳, 부엌, 측간 등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뜰에는 연못을 만들었고 못가의 작은 언덕에는 화초를 심었다”(제9차 통신사 제술관 신유한의 기록). _ 641쪽

- 제6부 우여곡절 끝에 귀환하다
제6부는 통신사의 귀환 여정을 그린다. 대부분 통신사가 홀가분하게 돌아와 임금에게 복명(復命)함으로써 파견을 마무리했지만, 큰 사고를 당한 경우도 있었다. 주로 일행의 죽음이었는데, 병에 걸리거나 해로에서 폭풍에 휘말려 죽는 이도 있었지만, 일본인에게 살해당한 이도 있었다. 제11차 통신사의 도훈도(都訓導) 최천종이 대표적이다. 당시 정사 조엄은 간단히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먼저 부산에 보내는 동시에, 사건의 전말을 밝히기 위해 일본을 굉장히 압박했다. 결국 범인을 잡아 참수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된다.

“통신사의 수행원을 죽인 것은 진실로 일본의 크나큰 수치다. 통신사는 장군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왔는데, 그 일행에게 이처럼 흉악한 일을 저지른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당연히 이 일로 쓰시마 사람 중에는 조선과 일본 양쪽에서 모두 인심을 잃은 자가 많았다”(저자). _ 723쪽

‘성’(誠)과 ‘신’(信)으로 관계를 회복한 조선과 일본
답사 내내, 또 일본에 머물며 원고를 탈고한 반년간 저자는 조선이 일본과 어떻게 관계를 회복했는지 깊이 탐구하고, 이를 오늘 한국과 일본 사이에 놓인 산적한 외교 문제를 푸는 데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당시 통신사가 맡은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피로인(被虜人), 즉 왜란과 재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을 다시 데리고 오는 일이었다. 조선의 요구에 일본이 바로 사과하고 그들을 보내준 것은 아니나 나름 성의를 보였다. 군대가 저지른 일이라는 점에서 위안부 문제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다만 오늘 일본은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으므로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고 하니 400여 년 전보다 태도가 후퇴했다.
저자가 일본을 답사했을 2017년은 위안부 문제에 북핵 문제까지 겹쳐 한국과 일본의 사이가 어느 때보다 안 좋았을 시기다. 그가 통신사의 길에서 만난 많은 일본인이 ‘계속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면 곤란하다’거나 ‘양국이 위안 문제를 정치적으로 다루면 안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반응했다. 그러던 중 NHK에서 방영한 한 다큐멘터리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고백: 만몽(滿蒙) 개척단의 여인들」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만주로 들이닥친 소련군이 만주 개척단의 일본 여성들을 위안부로 삼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본인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은 상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조선과 일본의 외교를 최전선에서 이끌었던 이들이 ‘성’(誠)과 ‘신’(信)을 강조한 이유를 찾는다. 정성과 믿음으로 인내하고 끈기 있게 상대를 대하면 서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고 풀지 못할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말한 것이다.
누군가는 오늘 동북아를 화약고에 비유한다. 특히 한일 관계가 최악이다. 위안부 문제가 불거진 이후 정치적인 교류는 완전히 멈췄다고 할 정도다. 당연한 얘기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다. 우리가 다시 한번 통신사의 지혜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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