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견루(石見樓) 이복현(李復鉉, 1767~1853)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중반까지 활동한 시인이자 관료이다. 왕성하게 시를 창작한 시기는 정조대와 순조대였다. 석견루의 생애 전작은 『석견루시초』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19세기 시조 문학을 대표하는 이세보(李世輔, 1832~1895)가 바로 석견루의 증손인데, 북경에 사신으로 간 기회를 이용하여 그곳에서 이 시집을 간행하였다. 이 시집은 석견루 시의 전모를 조명하는 데 좋은 선본(善本)이다.
저자 소개
저자 : 이복현
이복현(176~1853)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견심見心, 호는 석견루石見樓이다. 인조仁祖의 친동생 능원대군綾原大君의 5대손이며, 도사都事를 지낸 후근厚瑾의 아들이다. 시조 시인으로 유명한 경평군慶平君 이세보李世輔가 그의 증손이다. 종실의 후손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진보 현감, 김포 군수, 고성 군수, 청풍 부사, 곡성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평소 시인으로 자부하여 시단詩壇의 황금기인 정조와 순조 대에 개성 있는 시인으로 명성이 높았다. 87세까지 시 창작을 멈추지 않고 당대의 주요 인사들과 교유하였으므로 당시 시단의 동향을 알 고자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인물이다. 사후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고, 시집으로 『석견루시초』가 전한다.
조선 후기 시단의 명가(名家)로 꼽히는 석견루의 시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고, 전모를 조명하는 데 가장 좋은 시집
석견루(石見樓) 이복현(李復鉉, 1767~1853)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중반까지 활동한 시인이자 관료이다. 왕성하게 시를 창작한 시기는 정조대와 순조대였다. 그의 이름은 시단에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 무렵에는 쟁쟁한 시인들이 다수 배출되어 조선 후기 시단의 황금기를 형성하였다. 시단의 황금기에 석견루는 폭넓은 창작 활동을 전개하여 개성 있는 시인으로 이름을 얻었다. 87세로 장수하여 장기간에 걸쳐 중요한 시인들과 교유하였기에 당시 시단의 동향을 알고자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석견루는 오랫동안 능관(陵官)과 지방관을 지낸 경력을 지니고 있다. 다만 조정의 주요 직책이나 고위직을 맡지 않았고, 관료로서의 업적을 평가할 만한 자료가 부족하여 구체적 사실을 거론하기는 쉽지 않다. 또 산문으로는 [석견 노인의 60세 자서전]과 [음시처 상량문]을 비롯하여 몇 편만을 남겼을 뿐이다. 경력과 남겨진 작품에서 보듯이 석견루는 순전한 시인으로 수많은 시인과 교유한 시단의 핵심 인물이었다.
조선 후기 시단의 명가(名家)로 꼽히는 석견루의 생애 전작은 『석견루시초』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19세기 시조 문학을 대표하는 이세보(李世輔, 1832~1895)가 바로 석견루의 증손인데, 북경에 사신으로 간 기회를 이용하여 그곳에서 이 시집을 간행하였다. 이 시집은 석견루 시의 전모를 조명하는 데 가장 좋은 선본(善本)이다.
정조 시기로부터 철종 시기까지 조선 왕조의 시단에는 뛰어난 시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중에서 현대에 들어와 주목받는 시인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들은 대체로 시의 수준과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주목을 받고 있으나, 실제로는 역사적 위상이나 학술적 저작이 주목받은 덕택인 경우가 많다. 오로지 시 작품의 가치만으로 주목받은 시인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시대의 시를 이해하고 주목하는 독자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석견루 이복현 역시 그런 운명에 처한 시인이다.
석견루는 순수하게 시인으로 이름을 남긴 시의 명가였다. 석견루에 서 시작하여 두 명의 아들 이제은과 이제로, 그리고 증손 이세보로 이어지는 시인의 가계도 19세기 시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세보는 북경에서 『석견루시초』를 간행하여 시인으로서 석견루의 가치와 위상을 세상에 분명하게 각인시켜놓았다. 그러나 간행된 시집마저 고서실의 서가에 오랫동안 묵혀 있어 연구자들도 쉽게 보지 못했다.
이 책이 간행됨으로써 석견루의 시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는 지름길이 되고, 나아가 조선 후기의 시단과 이세보의 시조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