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한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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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55619768
쪽수 : 460쪽
수지 린필드  |  바다출판사  |  2018년 0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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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굶주림에 뼈만 앙상한 난민들, 전쟁통에 팔다리가 잘린 아이들, 폭탄테러로 산산조각 난 그을린 주검들…… 사진은 세계가 발하는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빛을 담아낸다. 그러나 이 불편한 진실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기에 외면당하고, 희생자를 모독하고, 감상자의 관음증을 부추기고, 자극에 지쳐 점점 참상에 둔감하게 만드는 ‘재난 포르노그래피’에 불과하다고 매도당한다. 사진의 진실과 객관성을 불신하는 포스트모던 비평은 메시지 대신 메신저를 공격하기까지 한다.

정치폭력과 고통을 찍은 사진이 착취적이고 선정적이라는 비난은 정당한가? 이런 사진을 보는 올바른 태도란 무엇인가? 사진 속 사람들과 우리는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가? 사진은 세상을 더 살 만하게 바꿀 수 있는가? 사진은 어둠을 비출 수 있는가?

책은 이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사진에 대한 회의를 피력한 발터 벤야민, 베르톨트 브레히트, 수전 손택의 주장을 살펴보고, 홀로코스트와 중국 문화대혁명에서 시에라리온의 집단학살과 아부 그라이브의 포로 학대까지 정치폭력을 증언하는 사진들을 검토하고, 로버트 카파와 제임스 낙트웨이, 질 페레스라는 우리 시대 대표적 포토저널 리스트들의 작품들을 분석한다.

어찌할 수 없는 세계의 비참 앞에 ‘외면해!’라고 말하는 회의주의자들에게, 저자는 그럼에도 보지 않으면 바꿀 수 없다고 대답한다. 고통스런 사진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사진이 전하는 무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희생자가 처한 프레임 밖의 현실을 이해하고 행동할 것을 요청한다. 혁명의 낙관주의가 사라지고 냉전 이후 인간의 잔인성이 폭발한 이 허무주의 시대에도, 저자는 카메라가 이끌어내는 ‘공감의 도약’을 믿으며, 사진이 ‘연대’의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저자 소개
지은이 : 수지 린필드 (Susie Linfield)
미국의 언론학자이자 언론인.
뉴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조지 발란신의 아메리칸 발레학교에서 수학했다. 뉴욕시립발레단과 여러 작품을 공연하기도 했으나, 필드스톤 스쿨에 다니던 중 역사와 정치학에 관심을 갖고 전공을 바꾸었다. 오벌린대학에서 미국사를, 뉴욕대학교에서 저널리즘과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을 공부했으며, 《아메리칸 필름》 편집장, 《빌리지 보이스》 부편집장, 《워싱턴포스트》 미술편집자를 역임했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뉴욕대학교 언론학부 교수로 있으며, ‘문화보도와 비평’이라는 대학원 과정을 맡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북리뷰》 《뉴욕타임스》 《북포럼》 《빌리지 보이스》 《뉴 리퍼블릭》 《워싱턴포스트》 《디센트》 《네이션》 등 다양한 매체에 문화와 정치가 교차하는 주제들에 관한 글을 기고하고 있다.
이 책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전쟁, 집단학살, 잔학행위를 담은 사진들에 대한 포스트모던 비평의 과도한 비판에 맞서, 우리를 “공포와 예술이 만나는 도덕의 지뢰밭”으로 안내하고 포토저널리즘의 위상을 성공적으로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2010년 미국비평가협회상 비평 부문 최종후보에 올랐다.


옮긴이 : 나현영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업에 종사하다가 현재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지그문트 바우만, 소비사회와 교육을 말하다》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 《편집증》 《쿤/포퍼 전쟁》 《사일런스 : 존 케이지의 강연과 글》 《집단 기억의 파괴》 《퍼스널 베스트》 《낭만주의의 뿌리》(공역), 《월드체인징》(공역) 등이 있다.
목 차
목차 없는 상품입니다.
출판사 서평
“폭력적 세계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제임스 에이지가 ‘존재의 무정한 빛’이라고
부른 것을 바라보고, 탐구해야 한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디언》

“포토 저널리즘의 힘에 대한 포스트모던 비평의 혼란을 영리하고 알기 쉽게 해체한다.” 《LA 타임스》

사진비평 분야의 오랜 지적 침체 끝에 나온 이 책은 자극적이고 생기 넘치는 논의를 제공하고, 다큐멘터리 사진이 우리의 세계 이해에 끼친 결정적 영향을 강조하며 훌륭히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하아레츠Haaretz》

“걸작. 수지 린필드는 사진을 보는 좋은 눈과 정치를 보는 좋은 머리를 지녔다.”
마이클 왈져 Michael Walzer(정치철학자)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것인가, 바라볼 것인가
콩고, 르완다, 보스니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냉전 이후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끔찍한 전쟁과 학살의 소식을 우리는 대개 전쟁 사진 작가들이 찍은 사진을 통해 접한다. 그 사진들을 보며 우리는 충격과 연민,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사진을 지적으로 바라보는 사진 비평가들에게 이러한 사진, 정치폭력을 담은 다큐멘터리 사진은 불편함을 넘어 혐오와 경멸의 대상이다. 이유인즉 이런 사진은 폭력과 고통을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전시하여 희생자를 구경거리로 삼는(따라서 모독하는) 자본의 시선이며, 감상자가 피투성이 스펙터클에 과다 노출되다 보면 정작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는 동정피로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을 반박하며 포토저널리즘의 가치와 가능성을 옹호하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논지다.
사진에 대한 의심은 탄생의 순간부터 있었다. 근대의 발명품으로서 예술과 기술, 창조와 모방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사진은 모더니티에 대한 모든 의혹을 대표했다. 대중은 누구나 손쉽게 찍고 복제할 수 있는 이 새로운 민주적 매체에 열광했지만,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대체로 적의를 표명했다. 발터 벤야민은 사진을 현실로부터 아우라를 빨아내는 세속화의 첨병으로 보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극도의 비참을 흥밋거리로, 인류의 고통을 소비 대상으로 탈바꿈하는” 사진의 미화 능력을 신비화의 한 형식으로 규정했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한발 더 나아가 사진은 본래 반관조적이며, 이미지의 범람은 결국 개인을 위축시키고 무관심과 무지를 조장해 현실을 은폐하는 데 기여한다고 여겼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도 사진은 세계의 진실을 드러내기보다는 “부르주아의 손에 들어가 진실에 맞서는 끔찍한 무기”가 되었으며, 군수공장을 찍은 사진이 그 산업의 실체를 보여주지 못하듯, 단순한 재현은 현실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더 최근 비평가들의 견해도 부정적이기는 매한가지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단조롭고 진부하고 어리석고 무교양적인 ‘재난’으로 묘사했고, 존 버거는 전쟁사진들이 보는 이에게 도덕적 무력감만을 안기고 정작 그 원인인 전쟁은 탈정치화한다고 비난했다. 오늘날 주류 사진비평의 냉소적 논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수전 손택에 따르면, 사진은 기만적이고 제국주의적이고 관음증적이고 착취적이다. 정치폭력을 기록하는 카메라는 희생자를 “추정하고, 침범하고, 침입하고, 왜곡하고, 약탈하고…… 암살한다.”
1970년대부터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 비평은 모더니즘 예술의 해체라는 원대한 기획 아래 사진의 진정성, 독창성, 자율성을 공격하며 선배 비평가들의 언어를 그대로 차용했다. 그들에 따르면, 사진은 겉으로는 계급과 문화를 뛰어넘는 객관적 진실을 표방하지만 사실은 자본주의의 충직한 노예,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통제장치, 가장 제국주의적인 매체에 불과하다. 사진은 감상자에게는 공포영화와 같다. 공포의 외양을 띠지만 그 위협은 판타지에 불과하다. 반면 희생자에게 사진은 이중의 정복행위를 저지른다. 피사체는 “먼저 억압적인 사회적 힘에, 그 다음으로 ‘이미지의 지배’에 희생된다.” 요컨대, 사진은 자기도취와 관음증 사이의 추잡한 비즈니스이고, 그것을 보는 행위 역시 범죄나 마찬가지다.

사진을 혐오해 온
사진비평가들의 지적 담론
포토저널리스트를 향한 우리 시대 만연한 ‘지적 담론’을 살펴보자. 여기엔 우리 모두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당한 무력한 존재로 간주하면서, ‘사진의 진실’을 여전히 믿는 ‘낡은’ 포토저널리스트들을 비웃는 풍토가 있다. 저자는 사진을 혐오하는 현대 비평가들을, 무함마드를 풍자한 덴마크 만화가를 처형하라고 외치던 성난 무슬림 군중과 겹쳐놓으며 동일한 후진성을 개탄한다. 그 시위자들도 해당 이미지를 착취, 모독, 제국주의의 ‘정복행위’라고 비난했다. 이미지를 증오하고 검열하는 데서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가 서로 합류하는 셈이다.
저자는 사진에 대한 이 모든 비판의 핵심에 ‘감상주의’에 대한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사진을 바라보는 즉시 우리는 본능적 감정에 휩싸인다.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충격, 공포, 연민, 분노의 강렬함은 다른 어떤 예술도 따라오지 못한다. 하지만 감정을 배제한 ‘차가운’ 글쓰기를 전문으로 하는 비평가들에게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이 강력한 힘은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사진이 환기하는 감정은 통제와 예상을 벗어나기 일쑤다. “굶주린 사람의 사진을 보고 혐오를 느낄 수도 있고, 어린아이의 사진을 보고 성적 흥분을 느낄 수도 있으며, 대학살의 현장을 찍은 사진에 따분함을 느끼거나 반대로 지나친 흥미를 느낄 수도 있다.” 사진비평가들은 사진이 불러오는 우리 안의 억압된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것일까 봐 두려워한다. 뿐만 아니라 사진은 세계의 작동방식, 사태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으며,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모호하게 전달하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다(모든 폭격 사진, 모든 학살 사진은 구체적 맥락을 모르고 보면 다 엇비슷해 보인다). 감정은 넘치는데 설명은 부족하다. 바르트가 사진의 어리석음이라고 부른 것은 사진의 이러한 반설명적이고 반분석적인 성격이었다.
일찍이 사진에 불만을 피력한 세 독일인, 특히 브레히트에게 이러한 감정적 접근은 가장 나쁜 접근방식이었다.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은 언론의 황금기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각종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온갖 자극적인 사진들로 도배되었다. 사민주의자, 공산주의자, 나치가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조작된 사진들이 정치적 선전선동 수단으로 동원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혼돈과 파멸로 치닿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브레히트는 성찰되지 않은 감정은 ‘인민의 아편’이며, 예술은 반드시 감정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엄청난 파급력을 지녔지만 악용하고 오독할 위험성도 큰 사진에 대해서 벤야민이 우려를, 크라카우어가 경멸을, 브레히트가 분노를 표한 것은 일면 타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바이마르 시대가 아니며, 우리는 그때와는 다른 상황에 직면해 있다. 특정한 역사적 맥락을 떠나서 이들의 주장을 금과옥조인 양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다.

사진 속 ‘이름 모를 희생자’와
연대한다는 것
포스트모던 비평가들이 칭찬하는 사진이란 세계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하거나 인간의 내면을 파고드는 사진들뿐이다. 세계를 정확하게 기술할 방법이 없기에 밖으로 나가 세계를 보기를 포기한 꼴이다. 이들은 ‘사진의 진실’이라는 개념을 ‘부르주아의 끈질긴 설화’라고 조롱하면서, 사진은 현실을 참되게 보여줄 수 없고, 보여줄 현실 자체가 없다고까지 말한다. 전통적 포토저널리스트가 사진의 객관성을 믿는다면, 포스트모던 비평가는 사진의 주관성에 집착한다.
이들은 벤야민의 말을 복음처럼 받들면서도 정작 벤야민의 변증법적 상상력은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모든 예술처럼 사진도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이고, 발견되는 동시에 만들어지며, 죽은 동시에 살아있고, 감추는 동시에 드러내는” 것이다. 사진을 본다는 행위 자체가 그 즉각적인 이미지와 그것을 보고 우리가 떠올리는 생각과 느낌, 숨은 의미, 사진을 둘러싼 지식과 정보 사이의 변증법적인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프레임 안에도 없고 프레임 밖에도 없다. 중요한 것은 둘 사이의 관계이며, 바로 여기에 사의 의미와 힘이 있다.”
사진에게 감정은 약점이라기보다는 강점이며, 감정은 비판적 사고를 약화시키기보다 오히려 강화할 수 있다. 비평가들의 과장된 수사와 달리, 사진은 도덕적 무력함만을 야기하지 않으며, 반대로 보는 이를 깨우치고 분노하고 행동하게 만들기도 한다. 실제로 베트남전쟁을 찍은 사진들은 전쟁에 반대하는 정치적 움직임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폭력을 기록한 사진은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라고 말하는 동시에 ‘이것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라고 암시한다. ‘이런 일이 계속되고 있다’라고 한탄하는 동시에 ‘이 일은 중단되어야 한다’라고 외친다. 고통의 기록은 곧 저항의 기록이며, 이것이 사진의 변증법이자 사진의 희망이다.
하지만 감정을 의식적으로 배제하는 ‘미학적 청교도주의’가 사진을 조각조각 해체해버린 결과, 사진을 감상하는 우리의 능력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브레히트의 후예다. 사진과 감정적 거리를 두는 데 어느 때보다 능숙하고, 사진작가의 열정을 조롱하고 감상을 비웃는 데 뛰어나다. 포스트모던 사진비평에 맞서 저자가 옹호하려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감상법이다. 사진이 전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더 알고자 하며 사진 속 이름 모를 희생자와 연대하려는 마음, 사진이 불러일으킨 감정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타인에 공감하려는 노력, 바로 사고와 감정의 변증법이다.
사진에 대한 냉담한 태도를 그만 버릴 때가 됐다. 사진비평은 “분석과 감정 사이의 끝나지 않는 전쟁을 조장하기보다 감정을 분석의 자극제로 활용할 수 있다. 또 이 세계의 고통을 외면하게 하기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할 수 있다.” 사진비평가는 우리가 사고와 감정, 현재와 역사를 동시에 품은 온전한 인간으로서 사진에 다가가도록 도울 수 있다.

고통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향한
희망과 절망 사이
오늘날 다큐멘터리 사진과 사진작가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도를 넘었다. 특히 폭력과 고통을 기록한 사진에 ‘포르노그래피’라는 딱지를 마구잡이로 붙이고 있다. 전쟁사진을 ‘전쟁 포르노’로, 가난한 나라의 비참한 상황을 찍은 사진을 ‘개발 포르노’로 쉽사리 매도한다. 남이 보아서는 안 되는 사적인 영역을 눈요깃감으로 삼는 것과 존재하지 말아야 할 정치적 폭력을 폭로하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문제다. 무한히 갖다 붙일 수 있지만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포르노그래피’라는 용어를 남발하는 것은 실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난하고 싶은 사람에게 수치심을 안기고 더 이상의 논의를 침묵시키기 위해서다. 폭력과 고통을 폭로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숨기는 것이 옳단 말인가? 왜 사태의 진상보다 진상을 알린 사람을 외설적이라고 비난하는가? ‘적’은 사람들의 상처와 절망을 기록하는 이들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기는 이들이 아닌가?
비평가들은 사진가에게 불가능한 이상을 주문하고 있다. 한 점 티끌 없이 깨끗한 시선으로 나무랄 데 없이 균형 잡힌 이미지를 생산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한 개인의 몰락을 보여주면서 아무런 문제 없는 방식이 있을까? 한 민족의 죽음을 아무런 동요 없이 묘사할 수 있을까? 용서할 수 없는 폭력을 누구에게도 불쾌하지 않게 기록할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사진을 ‘포르노그래피’라고 비난하는 청교도주의적 태도는 희생당한 피사체의 고통보다 감상자의 떳떳함을 더 신경 쓰는 위선적 태도다. “이 세계의 가장 잔인한 순간들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 따라서 무죄로 남고 싶은 마음”을 은연중 드러낼 뿐이다.
잔학행위를 증언하는 충격적인 사진들이 사람들을 오히려 둔감하게 만든다는 비난은 또 어떤가? 이른바 ‘동정피로’란 거짓이다. 일찍이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며 그들을 구하려고 행동에 나섰던 적이 있었던가? 대부분의 역사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20세기 들어 카메라가 전해준 ‘나쁜 소식들’에 힘입어 비로소 인간의 양심은 전 지구로 확대되었다. 사진은 우리의 감정을 둔하게 만들기는커녕 인간성의 의미를 되새고 인권의식을 고취시켜준 핵심 요소였다. 브레히트도 손택도 감상을 백안시했지만,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감상성이야말로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열쇠다. 타인의 곤경에 가슴 아파하고, 타인도 상처받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연대로 승화시키는 것, 저자가 ‘공감의 도약’이라고 부르는 이 인도주의적 변화를 촉발하는 데 사진은 어느 매체보다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한편 정치폭력을 기록한 사진은 희생자를 모독하는 것이니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저자가 ‘거부파’라고 부르는 이 경건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진들을 희생자의 동의 없이 찍는 행위뿐 아니라 보는 행위마저도 희생자를 다시 한 번 희생시켜 범죄를 재현하는 행위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으면 모두가 파시즘에 경도된다는 주장만큼이나 어불성설이다. 실제로 나치는 유대인을 비하할 목적으로 게토의 끔찍한 모습을 촬영했지만, 그 사진들이 보여주는 것은 유대인의 나약함이나 굴욕이 아니라 나치의 만행과 야만성이다. 정작 피해 당사자인 유대인들은 나치가 남긴 사진을 거부하기보다는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알리는 자료로 적극 수용했다.
나치가 말살 정책을 펼치는 동안, 게토의 유대인들은 고문당하고 굶어 죽어가면서도 필사적으로 몰래 기록을 남기고 사진을 찍어 밖으로 전했다. 살아남을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상황에서도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범죄를 바깥세계가 알아주기를, 자신들이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 기억해주기를 바랐다. 죽은 이들은 분명히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희생자에 대한 모독이다.

이 시대 최고의 포토저널리스트들이
서 있는 도덕적 갈림길
? 로버트 카파, 제임스 낙트웨이, 질 페레스
로버트 카파는 포토저널리즘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스타 사진작가다. 그는 스페인 내전에서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인도차이나 전쟁까지 총알이 빗발치는 수많은 전장 깊숙이 들어가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 전쟁을 가까운 거리에서 담아내 전쟁사진작가의 전형이 되었다.
유대인이자 망명자로서 카파는 파시즘이 득세해가는 암울한 시대를 지켜보면서도 시종 역사와 정치 그리고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를 잃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진은 오늘날의 사진과는 많이 다르다. (저자는 고통과 잔학행위를 선명히 강조하는 오늘날의 사진 경향은 포토저널리즘의 변화라기보다는 전쟁과 폭력, 정치 자체의 근본적 성격 변화를 반영한 결과라고 말한다.) 전쟁과 죽음의 참상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 대의를 위해 뛰어든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주로 찍었다. 전투의 막간에 환한 얼굴로 춤을 추는 민병대원들, 노천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는 노동자와 농민들, 임종을 앞둔 전우의 마지막 편지를 받아 적는 병사……. 카파는 제임스 낙트웨이처럼 형식적으로 완벽하지도, 질 페레스처럼 미학적으로 대담하지도 않지만, 일상의 평범한 순간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해 사진을 더 충만하게 만드는 비범한 재능이 있었다. 이것은 미학적이라기보다는 윤리적인 능력으로, 다정함과 겸손함, 결의와 비탄이 뒤섞인 그의 사진은 한번 보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카파는 지난 세기 투쟁적 인본주의가 피어나던 순간을 기록했다. 인간이 증오, 공포, 무지가 아니라 우애, 희망, 연대를 위해 하나 되던 귀중한 순간, 역사가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었던 드문 한때를 기록했다. “카파의 사진은 인간의 고통을 보여주며, 그 고통의 이유를 알고 싶게 한다. 카파의 사진은 인간의 인내를 보여주며, 그 인내의 방법을 알고 싶게 한다.” 카파는 더 공정한 세상을 바라는 투쟁이 가끔은 성공하지만 대개는 실패하고 만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럼에도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불합리하지도 보잘것없지도 않음을 사진을 통해 보여주었다.

로버트 카파 골드 메달을 다섯 차례나 수상한 제임스 낙트웨이는 우리 시대 가장 인기 있는 전쟁사진작가다. 집단강간, 사지절단, 집단학살 등 신체에 가해지는 온갖 잔학행위를 적나라하 묘사하는 그의 사진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즉각 본능적 혐오를 불러일으킨다. 정치적 대의명분 없이 폭력이 자행될 때 사진이 무엇을 찍게 되는지를 낙트웨이는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무도 보고 싶어하지 않지만 보아야만 하는 진실을 비추는 낙트웨이의 사진은 “오늘날 포토저널리즘을 놓고 벌어지는 논란이 집중되는 피뢰침”이다. 그의 사진 앞에서 무력함과 절망을 느낀 평론가들은 그를 포르노그래퍼, 관음증 환자로 매도한다. 사람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역겨운 짓보다 그 시각적 재현에 더 불쾌해하는 이 지나치게 여린 비평가들의 주장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낙트웨이 사진의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이 비난에 기름을 끼얹는 것도 사실이다. 일례로 수단의 한 기근 희생자를 찍은 사진을 보면, 한쪽 팔꿈치로 온몸을 지탱한 채 땅바닥에 누워 있는 여자는 너무 야위어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것이 기적만 같다. 그녀는 사진 한구석의 양복 입은 남자가 내미는 ‘유니세프’라고 적힌 식량배급권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다. 이것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대한 잔인한 패러디다.
평론가들은 전쟁 한복판의 죽어가는 사람들 한가운데서 어떻게 구도나 스타일을 신경 쓸 수 있느냐며 낙트웨이의 미학적 탁월함을 도덕적 타락의 증거로 비난한다. 그러나 낙트웨이의 시적 스타일 때문에 피사체의 산문적 고통이 가려지지는 않는다. 끔찍한 내용과 미학적 형식을 결합하는 낙트웨이의 모순어법 때문에 그를 ‘재난 포르노그래퍼’로 폄하하는 것은 그의 작품이 제기하는 우리 시대의 폭력에 대한 곤혹감을 회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낙트웨이가 카파만큼 우리를 고양시키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낙트웨이의 사진이 카파와 다른 것은 우리 세계가 그만큼 카파의 세계와 달라졌기 때문이다. 카파가 정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충동이 서로 일치하던 행복한(?) 시대를 살았다면, 우리는 그런 충동들이 산산조각난 야만적 허무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다. 낙트웨이의 태도가 카파와 다른 것은 야만을 낭만화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낙트웨이는 카파의 후계자라기보다는 대립항에 가깝다. 카파는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세계의 소식을 가져다주었다. 반면에 낙트웨이는 우리가 외면하려고 애쓰는 무자비한 현실을 우리 눈앞에 계속 들이민다. 비록 세계의 파국을 바라보기 고통스러울지라도, 사태를 환기시키고 행동을 촉구하는 그의 작업은 결코 틀린 일도 쓸모없는 일도 아니다.

수수께끼 같은 지적인 사진으로 유명한 질 페레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회의주의를 수용한다. 그러나 사진이라는 매체를 불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진의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해서다. 그는 사진에는 사진가, 카메라, 감상자, 현실이라는 네 명의 저자가 있으며, 이 중 가장 큰 목소리를 내며 가장 맹렬히 말하는 저자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페레스도 카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현실을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지만, 그 현실을 이해하기 어려움도 잘 안다.
페레스는 전쟁사진작가가 아니지만 낙트웨이와 마찬가지로 이란, 보스니아, 르완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세계 분쟁지역을 누비며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낙트웨이의 극도로 통제된 분위기, 냉정한 태도와 달리 페레스의 사진은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하다. 온갖 시각 정보들이 부조화를 이루며 병치되어 있고, 구도는 중심을 벗어나기 일쑤다. 닻을 잃고 표류하는 역사를 바라보며 그 자신도 혼란에 빠져 있는 듯하다. 페레스는 자신이 포착한 이미지들의 다층적 콜라주를 통해서 우리가 익히 알던 세계의 죽음을 알리고, 이러한 혼돈이 바로 희생자의 경험이라고 이야기한다.
페레스는 손쉬운 감정적 동일시와 관습적인 정치적 수사를 거부하지만, 그의 사진에는 항상 어떤 절박함이 있다. 그가 절박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냉전 이후의 나쁜 역사, 분파주의와 광신과 잔혹의 역사다. 영광도 명예도, 자유와 진보의 이상도 사라지고, 남은 것은 오직 추하게 일그러진 육체의 고통뿐이다. 르완다의 집단학살을 찍은 사진집 《침묵》은 페이지마다 부패한 시체들의 산을 비춘다. 비평가들은 이것은과하며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준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얼마만큼 보여주어야 적당할까? 충격적인 사실은 이 사진들이 발표되었을 때 사태는 아직 현재진행형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 사진들을 봤던 사람들이 나섰다면 어쩌면 더 이상의 학살을 멈출 수도 있었다. 페레스의 카메라는 인간의 폭력과 광기뿐 아니라 희생자의 비명을 모른 체하는 우리들의 ‘침묵’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또다시 나치 독일 당시와 똑같은 이야기에 이른다. 저기 악마 같은 야수가 날뛰고 있고, 우리 영혼이 피 흘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이들이다.”
페레스의 사진에는 동정 없는 세상을 바라보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부끄러움이 깊이 베여 있다. 그가 코소보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은 특히 인상 깊다. 사진은 들판에서 처형당한 한 사내의 맨발만을 보여준다. 발 옆에는 그가 죽기 전에 곱게 개놓은 옷가지와 구두가 있고, 구두 속에는 역시 잘 접어놓은 양말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처형 직전 사진 속 남자가 겪었을 외롭고 끔찍한 순간을 곱씹노라면, 두려움 한복판에서도 일상적 분별을 보여준 그 겸허한 행위 앞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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