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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나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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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나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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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60905450
쪽수 : 424쪽
이마무라 쇼헤이  |  마음산책  |  2018년 0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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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두 번 수상한 일본 감독, 영화감독 이마무라 쇼헤이의 국내 첫 산문집이다. 그가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41편의 산문, 오직 이 책을 위해 사흘 동안 진행된 인터뷰 전편, 그리고 그의 모든 영화를 다룬 상세한 필모그래피로 이루어져 있다.

쇼치쿠 영화사의 조감독으로 입사해 오즈 야스지로 같은 거장 밑에서 일하다 닛카쓰 영화사로 옮겨 감독 데뷔를 하고, 더 자유로운 제작을 위해 '이마무라 프로덕션'을 차려 독립하고, 후학을 키우고자 일본영화학교(지금의 일본영화대학)를 세우고 운영하기까지, 배우론, 연출론, 제작론, 교육론을 포함해 영화판에서 그가 겪은 수많은 일화가 한 편 한 편 유머와 우수를 간직한 채 펼쳐진다.

나아가 영화 바깥의 이마무라 쇼헤이도 섬세하게 보여주는데, 태평양전쟁 전후의 개인사며 추억,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쑥대밭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에 대한 관찰과 자신의 별별 생활법 등 따뜻하고 쾌활한 예술가의 일화들이다.

대학 시절 문학을 끼고 살았고 사실을 채집하는 데 능한 감독답게 이마무라 쇼헤이의 글은 문학과 다큐멘터리의 중간에 있어, 자신의 일들을 영화처럼 생생하게 전한다. 탁한 삶을 그리면서도 인간적 정서를 놓지 않았던 그의 영화들처럼 사람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삶에 열심이었던 현실의 이마무라 쇼헤이를 만날 수 있는 첫 책이다.
저자 소개
지은이 : 이마무라 쇼헤이 (今村昌平, Shohei Imamura)
영화감독, 다큐멘터리 작가, 영화제작자. 1926년 9월 15일 도쿄에서 중산층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연극을 보러 다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징용을 피하다 종전 이듬해인 1946년 와세다대학교 서양사과에 진학했으나 학업보다는 연극부 활동에 매진했다. 이 무렵 가정교사로 일하는 한편 전후戰後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암시장을 드나들며 돈을 벌고 훗날 그의 작품에 자주 투영될 뒷골목 문화를 익혔다. 1951년 대학교를 졸업하고 쇼치쿠 오후나 촬영소에 조감독으로 입사해 오즈 야스지로, 이케다 다다오, 오바 히데오 등 명장들 밑에서 일했으나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가와시마 유조였다. 3년 뒤인 1954년 닛카쓰 촬영소로 자리를 옮겨 1956년 가와시마 유조 감독의 <풍선>으로 각본 데뷔, 1958년 <도둑맞은 욕정>으로 감독 데뷔했다. 첫 감독작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돼지와 군함> <일본 곤충기> <붉은 살의> 등으로 명장의 자리를 굳혔다. 1966년 더 자유로운 영화제작을 위해 닛카쓰에서 나와 이마무라 프로덕션을 차리고 <인류학 입문> <인간증발> <신들의 깊은 욕망> 등을 내놓아 명성을 날렸다. 그 뒤 한참 다큐멘터리에 전념하다 극영화로는 11년 만인 1979년 걸작 <복수는 나의 것>으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이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2회 수상의 영광을 안긴 <나라야마부시코>와 <우나기>를 비롯해 <간장 선생>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등 말년까지 철저하고 속 깊은 영화를 남겼다.

2006년 5월 30일 도쿄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 일본영화대학의 전신인 일본영화학교를 세운 존경받는 교육자로서, 현재 일본 영화업계 종사자 중 상당수가 이 학교 출신이다.

옮긴이 : 박창학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와세다대학교 대학원 문화연구과에서 영화 이론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음악 프로듀서 및 작사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라틴 소울』, 옮긴 책으로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 『부디 계속해주세요』 『나쓰메 소세키론』 『영화의 맨살』 등이 있다.
목 차
신주쿠의 벚꽃은 환상

청춘 기행, 쇼치쿠 조감독 시대 / 요코스카 항구 기행 /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에서 / 여자 프로듀서 / 농촌 실습 / 사투리 / 결혼식 / 선생님의 가르침 / 성실한 여배우 / 항구 마을의 낭만 / 그 옛날의 삭막함 / 일본 영화의 발견 / 나의 스승 / 히바리 추도 / 오징어젓 / 유도가의 죽음 / K 군과 하구로도 / 꽃 피는 체리와 기타무라 가즈오 / 신주쿠 유곽터에서 / 노년의 동창회에서 / 쑥대밭의 무덤 / 조숙한 소년 / 가와시마 유조 기념회 / 싱가포르의 왕 씨 / 남태국의 일본인 의사 / 영화인과 빚 / 40대 독신남 두 사람 / 경솔한 강사 / 유객인 명부 / <검은 비> 제작 현장에서 / 말의 문제 / 도시형 전중파 / 요전번 전쟁 / 나라야마부시의 현재 / 자욱한 비합리 / 윗분들의 청소 사업 / A 군의 배구 / 서혜부와 안구 / 올 로케이션 영화의 비애 / 신주쿠 벚꽃 환상 / 여성의 세기

저건 더 이상 방도가 없다

여성의 성 근원에 도사린 것 /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 단역이어도 존재감이 분명해서 말이지 / 가와시마 유조는 압도적으로 훌륭한 감독 / 감정을 조장하는 음악은 필요 없다 / 이 타이틀은 몹시 부끄러웠다 / 내 뜻과 달라서 심통을 내면서 찍었습니다 / 매력 없는 여자를 보면 손해 봤다고 생각한다 / 나한테 문부대신상 같은 걸 줘도 괜찮은가 / 더 모자라고 더 의지가 없는 녀석을 그리고 싶었다 / 한 인간을 철저히 조사해 대본을 만들어본다 / 못난 여자가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 저건 더 이상 방도가 없다 / 연출은 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 처음부터 세트를 철거할 생각은 아니었다 / 배우들 모두한테서 무시당했죠 / 요코스카와는 인연이 깊다 / 배우도 아직 기대할 만하다 / 다시 찍고 싶은 작품 중 하나이기는 하다 / 조감독이었을 때부터 올 로케이션으로 찍고 싶었다 / 우라야마 기리오의 죽음으로 돌연 방향 전환 / 컬러는 아무리 해도 색이 경박해진다 / 칸에는 상을 받는 단계까지 있어본 적이 없다 / 땅을 파는 데 신경을 기울였다 / 장어 다음은 잉어가 어떤가 / 이쪽도 늙어빠져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좋지 않은가, 필모그래피

[극장 영화]
도둑맞은 욕정 / 니시긴자 역 앞에서 / 끝없는 욕망 / 니안짱 / 돼지와 군함 / 일본 곤충기 / 붉은 살의 / 인류학 입문 / 인간증발 / 신들의 깊은 욕망 / 호스티스가 말하는 일본 전후사 / 복수는 나의 것 / 좋지 않은가 / 나라야마부시코 / 뚜쟁이 / 검은 비 / 우나기 / 간장 선생 /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텔레비전 기록영화]
미귀환병을 좇아(말레이시아 편·태국 편) / 멀리 가고 싶다─나의 시모키타 / 부부안의 해적 / 가라유키상 / 무호마쓰, 고향으로 돌아가다

[그 밖의 작품]

<붉은 살의> 현장 대본
후기를 대신하여
연보
참고 문헌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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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두 번 수상한 일본 감독
영화감독 이마무라 쇼헤이의 첫 산문집


과거사 문제와 사회적 반감 때문에 음성적으로 향유되던 일본 대중문화가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받아들여진 건 겨우 1998년 10월, 제1차 일본대중문화개방 조치가 시행되면서부터다. 하지만 이때도 영화, 비디오, 출판물 등에서 부분적인 개방만 허용됐는데, 영화의 경우 한일 공동 제작 영화이거나 세계 4대 영화제 수상작에 한한다는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단 네 편의 영화만이 극장에 걸릴 수 있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가게무샤>,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 박철수의 <가족 시네마>, 그리고 이마무라 쇼헤이의 <우나기>.
1997년 <우나기>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기 전에도 이마무라 쇼헤이는 1983년 일본판 고려장 이야기인 <나라야마부시코>로 먼저 같은 상을 받고 이미 세계적 거장의 위치에 올라 있었으며,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두 번 수상한 유일한 일본 감독이라는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이런 성취를 이루고도 화려하고 밝은 주목을 누리기는 어색해했다. 대학 시절부터 문학도답지 않게 신주쿠 암시장 등을 돌며 뒷골목 문화를 익히고 비주류인 사람들 속에서 갖은 고생을 한 까닭에 어떤 저항심 내지 반골성을 띠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오가며 건달, 창부, 재일조선인, 그 밖에 외면당한 사람들에게 자주 눈길을 쏟았고 대중의 기호에 아랑곳하지 않는 길을 걸었다. 일본 영화계의 스튜디오 시스템에 안주하며 예술적 성취를 이루거나 돈 되는 영화를 만들겠단 일념을 간직하기보다는, 자금을 모으려 집을 저당 잡히고 주변에 아쉬운 소리를 하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해야 할 영화를 만들었다. 그렇게 그만의 주제와 영화 기법을 지켜 <복수는 나의 것> 등 지금껏 영감을 주고 인용되는 걸작을 남겼다.
『우나기 선생』은 영화감독 이마무라 쇼헤이의 국내 첫 산문집이다. 그가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41편의 산문, 오직 이 책을 위해 사흘 동안 진행된 인터뷰 전편, 그리고 그의 모든 영화를 다룬 상세한 필모그래피로 이루어져 있다. 쇼치쿠 영화사의 조감독으로 입사해 오즈 야스지로 같은 거장 밑에서 일하다 닛카쓰 영화사로 옮겨 감독 데뷔를 하고, 더 자유로운 제작을 위해 ‘이마무라 프로덕션’을 차려 독립하고, 후학을 키우고자 일본영화학교(지금의 일본영화대학)를 세우고 운영하기까지, 배우론, 연출론, 제작론, 교육론을 포함해 영화판에서 그가 겪은 수많은 일화가 한 편 한 편 유머와 우수를 간직한 채 그려다. 나아가 영화 바깥의 이마무라 쇼헤이도 섬세하게 보여주는데, 태평양전쟁 전후의 개인사며 추억,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쑥대밭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에 대한 관찰과 자신의 별별 생활법 등 따뜻하고 쾌활한 예술가의 일화들이다. 대학 시절 문학을 끼고 살았고 사실을 채집하는 데 능한 감독답게 이마무라 쇼헤이의 글은 문학과 다큐멘터리의 중간에 있어, 자신의 일들을 영화처럼 생생하게 전한다. 탁한 삶을 그리면서도 인간적 정서를 놓지 않았던 그의 영화들처럼 사람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삶에 열심이었던 현실의 이마무라 쇼헤이를 만날 수 있는 첫 책이다.

관찰자 이마무라 쇼헤이의 인류학 입문
독하고 따뜻한 산문에 담은 인간 군상의 희비극


<돼지와 군함>이 끝나자 역시 300-400만 엔쯤 예산이 오버돼 프로듀서는 시말서를 쓰고, 나는 이후 3년 정도 작업 배당을 못 받고, 근소한 계약금을 받기는 했어도 밀려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아내와 나이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도카이도의 미시마에 옮겨 가 살았다.
-232쪽

이마무라 쇼헤이는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은 두 영화와 <복수는 나의 것>으로 이름을 크게 떨쳤지만, 그의 극영화들이 되도록 감정을 자제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다큐멘터리, 즉 관찰과 기록 무척 능한 감독이었다. <돼지와 군함> <일본 곤충기> <인류학 입문> <인간증발> 같은 1960년대의 작품들은 다큐멘터리이거나 혹은 다큐멘터리에 버금가는 조사가 뒷받침된 영화이고, 그 뒤에는 1979년 <복수는 나의 것>을 내기 전까지 11년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극영화를 쉬면서 아예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그는 영화 만들기의 재미를 다음의 한마디로 압축한다. “인간이 재미있다.”(「후기를 대신하여」) 본질적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관찰과 고찰에서 그의 예술은 이루어졌다.
이런 면은 그의 산문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영화를 만들 때 “감정을 조장하는 음악은 필요 없다” 잘라 말하는데 그의 글도 다르지 않아, 억지스럽게 꾸미기보다는 그저 겪은 일들을 사실 위주로, 과잉된 감정 없이 편안하게 풀어놓는다. 그것도 예술가인 자신의 심미적인 자아를 천착하는 법은 거의 없고, 자신이 직접 겪었던 태평양전쟁 전후의 도쿄라든지 그 쑥대밭에서 살아가던 사람들 이야기, 전쟁 전의 평온했던 가족 이야기, 대학 시절 신주쿠 암시장을 드나들며 인생 공부를 한 이야기, 일상에서 스치거나 로케이션헌팅을 다니며 만난 사람들 이야기 등이다. 그의 눈은 대부분 타인을 향해 있다. 그에겐 자기 외부의 모든 게 글감이자 영화 소재였다.
그가 타인의 삶, 특히 소외당한 사람들의 삶을 주목하게 된 계기는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지만 그의 산문 곳곳에는 태평양전쟁 전후로 크게 달라진 삶이 때로는 자신의 일화로, 때로는 타인의 일화로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본성을 억누르고 사는 범상한 일본인을 주목하는 대신 더없이 솔직한 하층민과 서민을 주목하며, 큰 역사의 이면에서 실핏줄처럼 무시되다가 때로 통증으로 다가오는, 일본 사회의 모순이라 할 삶들을 요리조리 따지고 기억한다. 과한 동정 없이, 하지만 애정은 듬뿍 담아, 산전수전을 겪어본 사람답게 의젓한 웃음을 동반해 쓴 그의 글에서 거장의 배포며 어른의 너그러운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많이 조사하느라 너무 나가서 탐정 회사같이 됐어요. 조수 일을 하는 사람들은 호적등본을 떼다놓고 “시나리오네요”라더군요. 호적등본을 보니 굉장히 재미있어요. 어떤 사람의 과거를 조사하려고 호적을 보고, 그 사람이 정착한 발자취를 제1고에서 제2고로 끝도 없이 계속 작업했습니다. 이걸 “호적 놀이”라고 부르고 있죠. 기층 사회를 계속해서 조사해요. <일본 곤충기> 때는 매춘부와 매춘 알선업자의 관계를 취재해서 썼더니 대학 노트 세 권이 됐어요. 듣고 기록하는 취재가 무척 재미있는 거죠. 그런데 이걸 캐스팅해서 영화로 만들려고 하면 전혀 다른 기분이 돼버려요. 이 취재한 것이 영화화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생각은 합니다만. 줄거리를 쓰지 않아도 제대로 기층사회를 맞닥뜨리니까요.
-231쪽

조감독, 감독, 제작자를 거쳐 선생이 되기까지
이마무라 쇼헤이가 영화계에서 살아가는 법


쇼와 32년(1957년) 매춘방지법이 성립한 해, 요코스카를 무대로 <돼지와 군함>이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을 때 당시 아직 건강했던 오즈 야스지로와 노다 고고 선생이 입을 모아 “그대들 뭘 일부러 좋아서 버러지만 그리나?”라고 말씀하셨지. 그때 결정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버러지만 그린다.’
-218쪽

이마무라 쇼헤이는 1951년 와세다대학교 서양사과를 졸업하고 그해 쇼치쿠 영화사 조감독부에 입사했다. 당시는 일본 영화가 막 최전성기로 발돋움하던 때로, 쇼치쿠 영화사는 오즈 야스지로, 가와시마 유조, 시부야 미노루 같은 명감독들을 보유하고 철저한 도제 시스템을 앞세워 영화 부흥에 큰 몫을 했다. 이런 환경에서는 으레 제자가 스승의 그늘 안에 안주하기 쉽지만 이마무라 쇼헤이는 탁월하게 주체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3년 만에 쇼치쿠의 시스템을 벗어나 닛카쓰 영화사에서 자기 영화를 일구어갔으며, 1960년대에는 쇼치쿠 소속인오시마 나기사 같은 감독들과 일본 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끌었다. 일본의 영화사들이 줄도산한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에도 그는 자기의 작풍을 지키며 끝내 살아남았고 이후의 성과는 알려진 대로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아집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그토록 동경한 구로사와 아키라와 가와시마 유조뿐 아니라 존경과 애증이 공존했던 오즈 야스지로 같은 앞 세대 감독들이 하지 못한 일, 즉 ‘일본영화학교’를 만들어 젊은 영화인을 키우는 일에 자신의 힘과 재산을 모두 털었다. 앞 세대에 대한 반감에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교육은 거칠긴 해도 도제 방식과는 달랐고, 사제의 관계도 경직되었던 옛날과 달랐다. 그의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이 학교도 자기 혁신을 계속해 지금은 ‘일본영화대학’으로 개편되었다. 현재 일본 영화업계 종사자 중 상당수가 이 학교 출신이며, 우리나라와 중국 등 해외에서도 학생이 끊이지 않는다.
『우나기 선생』에는 쇼치쿠 영화사의 조감독으로 시작해 세계적 거장이 되고, 거기서 번 돈으로 다시 비대중적 영화를 만드는 것도 모자라 영화학교 선생님이 되어 학생들과 티격태격하기까지의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빼곡히 담겼다. 일본 영화계 시스템의 부흥과 붕괴를 함께하면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강단을 지킨 감독의 호방한 면면을 만날 수 있다. 일본 영화사史의 굴곡을 지나와 끝까지 거장으로 남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낱낱의 삶을 그 자신의 글과 말로 전한다.

일본영화학교도 창립 후 얼마 되지 않았고 게다가 이사 측에 의지는 낮으나 투기심은 충분하다는 식의 멤버도 있고 나도 이치만 좇아서, 운영이 뜻대로 안 되는 시기가 있었다. 덤으로 내 조수가 감독 독립하도록 자금 마련도 도와야 해서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 같은 1년이었다. 상층부를 완전히 교체하고 일체의 책임을 혼자서 폼 나게 짊어졌지만 빌딩의 집세도 직원의 급료도 지불할 수 없어서 오랜 지인, 친구에게 기대어 곳곳에 돈을 빌리며 돌아다녔다. (…) 남 탓을 할 수는 없다. 학생들이 적으로 보이는 게 싫어서 죽을 만큼 지쳤지만, 몇 사람인가하고 뜻밖에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선생님, 영화 찍어주세요. 우리가 아르바이트해서 자금을 모을 테니까”라고 말해 “얼마 모이는데?”라고 물으니 “한 사람에 5만 엔씩 30명이라고 치고 150만은 모입니다”라고 말한다. 금액의 적음도 감동적이라 나도 모르게 눈물을 머금은 일도 있다.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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