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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과학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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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과학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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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59253669
쪽수 : 415쪽
최경봉  |  들녘(도서출판)  |  2018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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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한국의 과학과 문명 시리즈 12권. 거시적 관점에서 한글의 위상과 그 영향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특히 과학문명사적 맥락을 천착하면서, 한글의 제자원리에 내포된 성리학적 과학주의를 톺아보고, 한글의 보급.확산이 조선 사회의 변화와 과학문명의 발전에 끼친 영향을 주요하게 검토한다.

이러한 고찰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한다. 첫 번째 고찰은 한글이 15세기 조선에서 창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비로소 국문의 지위에 올라선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두 번째 고찰은 한글이 조선 사회와 조선의 과학문명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며, 개화기 이후 한글이 우리 근대 과학문명의 초석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저자 소개
지은이 : 시정곤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와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석사,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학교 언어학과 객원연구원, 영국 런던대학 SOAS 객원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카이스트(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국어의 단어형성 원리』(1998), 『논항구조란 무엇인가』(공저 2000), 『우리말의 수수께끼』(공저 2002), 『한국어가 사라진다면』(공저 2003), 『북한의 문법 연구와 문법 교육』(공저 2004), 『영어 공용화 국가의 말과 삶』(공저 2004), 『현대국어 형태론의 탐구』(2006), 『현대국어 통사론의 탐구』(2006), 『응용국어학의 탐구』(2006), 『역사가 새겨진 우리말 이야기』(공저 2006), 『인간 컴퓨터 언어』(공저 2006),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공저 2008), 『조선언문실록』(공저 2011), 『훈민정음을 사랑한 변호사, 박승빈』(2015) 등이 있으며 논문 다수가 있다.

지은이 : 최경봉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어휘의미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재직 중이다. 현재 한국어의미학회, 한국사전학회, 한국어학회의 편집위원, 국립국어원 규범정비위원, 문체부 국어심의위원 등을 맡고 있다. 『국어선생님을 위한 문법교육론』(공저 2017), 『근대 국어학의 논리와 계보』(2016), 『어휘의미론: 의미의 존재 양식과 실현 양상에 대한 탐구』(2015), 『의미 따라 갈래지은 우리말 관용어 사전』(2014), 『우리말 문법 이야기』(2013), 『한글 민주주의』(2012),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공저 2008), 『우리말의 탄생』(2005), 『우리말의 수수께끼』(공저 2002) 등을 저술하였다.
목 차
저자 소개와 총서 기획편집위원회
일러두기
발간사_ <한국의 과학과 문명> 총서를 펴내며
서문

제1장 서론

1절 연구 배경과 방향

2절 연구사 정리
1. 훈민정음의 철학적 연구
2. 훈민정음의 음운학적 연구
3. 훈민정음 제자원리에 대한 연구
4. 훈민정음 보급과 사용에 대한 연구

3절 서술 방법과 내용
1. 서술 방법
2. 책의 구성

제2장 한글 탄생의 시대적 배경

1절 동아시아 문자 문명의 발달과 한글의 탄생
1. 동아시아의 문자문명의 전개 양상
1) 한국 역사에서 문자 인식의 흐름
2) 동아시아 지역의 고유문자 창제
■ 참고자료: 차자표기(借字表記)의 방식과 문자사적 의의
2. 아시아 문자문명의 결정체, 한글

2절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과 문화적 대응으로서의 한글 창제
1. 중국의 정치적 재편과 새로운 중국어의 탄생
1) 중국의 정치적 재편
2) 중국어의 변화와 운서
2. 조선의 건국과 새로운 지배이념의 탄생
1) 조선 초 통치 기반의 구축 맥락
2) 새로운 지배이념의 구축 맥락과 한글

제3장 15세기 조선의 과학문명과 한글

1절 한글 창제 배경으로서의 15세기 성리학
1. 세종과 사대부들에게 성리학은 무엇이었나?
1) 세상사를 설명하는 보편의 학문
2) 사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학문
2. 소리의 이치가 곧 세상의 이치: 『훈민정음』에 나타난 음운관과 성리학

2절 음운학의 정립과 훈민정음의 탄생
1. 중국 음운학의 수용
1) 중국 음운학의 성격과 도입 맥락
2) 중국 운서는 조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2. 조선 음운학의 정립
1) 세종시대, 조선 음운학의 두 가지 과제
2) 혼란한 한자음을 어떻게 바로잡았을까?
3) 『동국정운』과 『훈민정음』
4) 한글 창제의 음운학적 의미

3절 한글의 과학성과 성리학
1. 말소리의 근본을 구현한 문자
2. 만물의 생성 이치를 담은 문자
■ 참고자료: 『문자 체계(Writing Systems)』에 나온 자질문자론
3. 음성을 시각화한 문자
1) 발음기관의 모습이 곧 소리의 실체
2) 훈민정음 자형(字形)과 고전(古篆)의 관계
■ 참고자료: ‘보이는 음성’이란?

4절 세종시대 과학문명의 성격
1. 중화문명의 질서와 조선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
2. 보편성과 특수성에 기반한 조선의 과학문명
1) 천문역법
2) 농업기상학
3) 의학
4) 음악
5) 세종시대 과학 정신의 의의

제4장 한글의 확산과 문명의 발전

1절 훈민정음의 보급
1. 훈민정음의 보급과 교화
2. ‘교화’의 집행자인 지배계층과 훈민정음

2절 한글 교육과 한글의 확산
1. 제도적인 교육과 한글
1) 향교와 한글
2) 서당과 한글
2. 가정에서의 교육과 한글
1) 사교육과 한글
2) 여성과 한글
3. 한글의 보급과 외국어 교육의 혁신
1) 외국어 교육의 의미
2) 외국어 학습 교재의 발전
3) 이중어사전의 개발

3절 한글의 확산과 정보의 대중화
1. 한글의 확산과 생활문화의 변화
2. 한글과 과학문명의 대중화
1) 한글과 의학서
2) 한글과 농서
3) 한글과 병서
4) 한글과 조리서

4절 한글의 확산과 출판문화의 융성
1. 훈민정음과 한글 소설의 등장
2. 상업출판문화와 한글의 확산

5절 한글의 확산과 지식사회의 변화
1. 한글의 확산과 번역
1) 불경 언해
2) 유교 경전 언해
3) 과학실용서 언해
2. 실학(實學)과 한글
1) 실학자들의 한글 연구와 그 의의
2) 물명류의 편찬과 우리말 지식 기반의 구축

5장 한글과 근대 과학문명

1절 서구 열강의 침략과 동아시아의 재편
1. 중화문명의 해체와 새로운 질서의 형성
2. 서구 문물의 유입과 새로운 글쓰기의 출현
3. 근대화와 한글의 재탄생
4. 과학기술의 교육과 한글
1) 근대 교육의 목표와 방향
2) 교과서 편찬, 과학기술지식의 체계화와 한글

2절 한글 신문의 발간, 과학기술지식의 확산과 국민 계몽
1. <독립신문>의 발간 배경
2. <독립신문>과 한글 정신
3. <독립신문>과 근대 과학기술

3절 한글과 인쇄문화
1. 한글과 활자의 발달
2. 한글과 근대 출판문화

4절 풀어쓰기와 한글 기계화
1. 한글 활자의 한계와 풀어쓰기 운동
2. 한글타자기 개발
3. 컴퓨터 시대, 한글의 가능성

6장 결론

주석
표 및 도판 일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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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in English
출판사 서평
과학문명사적 흐름에서 포착한 한글의 위상과 역할 변화

문명의 시작은 문자의 탄생을 뜻하기도 한다. 문자의 탄생으로부터 인류 역사가 시작되었고, 문자와 더불어 문명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 책은 이와 같은 거시적 관점에서 한글의 위상과 그 영향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특히 과학문명사적 맥락을 천착하면서, 한글의 제자원리에 내포된 성리학적 과학주의를 톺아보고, 한글의 보급.확산이 조선 사회의 변화와 과학문명의 발전에 끼친 영향을 주요하게 검토한다.

이러한 고찰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한다. 첫 번째 고찰은 한글이 15세기 조선에서 창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비로소 국문의 지위에 올라선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두 번째 고찰은 한글이 조선 사회와 조선의 과학문명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며, 개화기 이후 한글이 우리 근대 과학문명의 초석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논의로서 다음의 네 가지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첫째, 15세기 한글의 창제와 19세기 말 국문으로의 격상 문제를 당시 세계질서의 흐름과 관련지어 살핀다. 한글의 창제는 아시아 문자문명 전개 과정에서 탄생했으며, 중화문명의 핵심인 성리학적 사유체계에 바탕을 둔 창조물이지만, 한편으로 중화질서의 틀 내에서 우리 실정과 풍토에 맞는 새로운 체제와 기술을 도입하고 우리 식 표준을 개발하려는 의지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둘째, 국문으로의 격상 문제에 관해서는 서구문명의 도입과 중화문명의 해체라는 변화 과정에서 한글의 역할이 변화하는 맥락에 주목한다. 갑오개혁으로 국문이 된 한글은 일반 대중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쳐 근대 문명의 초석이 되었다. 과학문명사의 관점에서, 한글의 국문화(國文化)는 한국 과학문명의 혁신적 변화와 맥을 같이한다. 셋째, 성리학적 사고의 틀을 근간으로 창제된 한글은 위에서 아래로 중세의 지배 이념을 확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한글이 보급되고 확산되면서 조선 사회는 소통 방식에서 일대 변혁을 맞이하게 된다. 넷째, 근대화 과정에서 한글이 근대적 과학기술지식의 착근과 확산에 끼친 영향에 주목한다. 국문으로 격상된 이후, 한글 활자가 널리 퍼지면서 인쇄문화가 발달하게 되고, 한글 인쇄문화의 발달은 빠른 기간 안에 서구적 과학지식을 보급하고 수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동아시아의 모든 문자문명을 하나로 용융시킨 도가니, 한글 창제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한자는 동아시아의 국제문자로서 그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있었지만, 몽고, 거란, 일본 등지에서 고유문자가 만들어지고 사용되면서 동아시아의 문자 판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고유문자는 시대와 나라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공통적인 것은 문자의 표음화(表音化)를 지향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흐름은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동아시아 문자 판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10-13세기경, 한반도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두와 구결 등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이용해 우리말을 표기하는 차자표기(借字表記)의 전통이 확립되어 있었다. 이로 볼 때, 당시 문자의 표음화에 대한 지향은 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이러한 흐름을 숙지한 상태에서 한글을 창제할 계획을 세웠고, 동아시아 제민족의 문자를 널리 참조하여 글자꼴을 만들었다. 즉, 새로운 문자와 관련한 세종의 상상력은 동아시아 문자문명의 토대 위에서 펼쳐졌던 것이다. 15세기 당시 조선의 주변 국가들이 어떤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는지, 세종을 비롯한 조선 지식인들은 주변 국가들의 문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단초는 최만리의 상소문에 대한 세종의 대응에서 확인된다.(52쪽)
그런데 동아시아 문자사의 흐름을 짚어보는 것만으로는 한글 창제의 배경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한글 창제의 배경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한글을 창제한 시기가 중국 대륙과 한반도의 정치, 사회, 문화적 격변기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외적로 볼 때, 중국은 중원에서 북방으로 정치경제적 중심지가 이동하는 격변을 겪는다. 원나라가 들어서면서 현재 북경 지역에 수도를 정하였고, 그 뒤를 이은 명나라도 처음에는 남경을 수도로 정했다가 머지않아 다시 북경 지역에 수도를 정했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특별히 음운학에 조예가 깊지 않은 한 표준 한자음을 정확하게 구사하기는 어려웠던 상황에서, 남북을 망라한 중국의 통일어를 담아내려는 시도가 이뤄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국어는 새롭게 재정비되어야 했고(『홍무정운』의 편찬), 이는 조선의 어문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동국정운』의 편찬).
조선이 건국한 1392년은 명의 통치체제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홍무제의 말기였다. 친명사대를 표방한 신진 세력이 건국한 조선은 자연스럽게 명의 조공체제에 편입되었지만, 명의 통치체제가 안정적으로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명의 의심과 견제는 태조 이성계의 재위기간 내내 계속되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왕들은 명과의 사대관계를 굳건히 하면서 집권 기반을 강화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태조의 뒤를 이은 태종은 조세제도와 신분제도 등을 비롯하여 사회문화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의 기틀을 마련한 왕이었다. 태종이 이렇게 왕조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던 데에는 태종의 뛰어난 지도력도 있었겠지만 명의 내부 사정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명의 영락제는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자금성을 짓는 등 거대한 국책 사업을 시행하고 정화로 하여금 서방 원정을 하게 했는데, 이 과정에서 과도한 세금과 부역에 내몰린 백성들의 원성이 잦아지고 홍수와 역병까지 돌자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영락제의 통치력이 약화되고 주변국에 대한 견제와 압력도 약해진 상황에서 태종은 국가체제와 통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북진정책으로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4군 6진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회문화제도를 정비하고 중국의 문물제도를 수용하여 정치, 사회, 문화 전 영역에 걸쳐 조선에 맞는 규범을 마련하였다. 세종대의 조선은 정치?사회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세종이 조선의 독자적인 기틀을 다지는 과정은 곧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수입한 후 이를 조선의 규범으로 전환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조선의 규범을 관통하는 것은 성리학적 사유체계였다. 성리학적 사유는 조선 지식인들이 세상을 보고 이해하고 살아가는 준거(準據)가 되었다. 당시 성리학적 사유체계를 준거의 틀로 삼는 것은 정치, 사회, 문화의 혁신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 사유방식의 혁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치적 자율성이 확보된 상태에서 성리학을 토대로 조선의 규범이 정립되면서 조선 사회는 소중화(小中華)를 실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찼다. 세종은 이러한 자신감과 실용주의 정신을 발휘하여 ‘한글’이라는 독특한 표음문자를 창제했다. 이 책의 3장은 한글의 독특한 제자원리가 성리학적 사유방식을 소리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근거로 삼은 결과임을 보인다.
한글은 한자문화권의 철학을 바탕으로 창제한 문자이자, 한자와의 조화와 한자문화의 수용을 염두에 둔 문자이면서, 당시 동아시아에서 사용되던 문자의 장단점을 분석한 결과를 수렴하여 우리말을 완벽하게 표기하는 소리문자로 창제되었다. 동아시아 어느 나라의 문자보다 체계적이면서도 합리적인 한글은 그 창제 배경을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조선 초기 주변 나라에서 썼던 다양한 방식의 문자, 둘째, 이들의 장단점을 파악하여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학문적 역량, 셋째, 한자문화권의 철학을 우리식으로 수용하여 우리만의 독창적인 음소문자를 창제할 수 있었던 자신감과 문화적 역량이 그것이다.

성리학적 과학주의의 구현, 한글

15세기 들어 조선왕조는 중국에 버금가는 문명국가를 이루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문명을 받아들이고 이를 적용하여 조선을 문명화하는 것은 조선왕조의 최대 과제였다. 세대의 눈부신 과학적 성과는 이러한 배경하에서 이루어졌고, 한글의 탄생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을 문명화하기 위한 핵심은 성리학적 통치이념을 백성 모두가 공유하도록 교육(교화)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 성리학의 사유체계에서는 인간의 본질이 마음에 있는 본성이고, 본성은 곧 이(理)에 대응한다. 그런데 몸과 마음을 이루는 기질에 따라 이(理)가 발현하는 정도에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 기질을 변화시켜 이(理)가 완전히 발현되도록 하는 과제가 남게 된다. 세종은 계몽군주로서 이(理)가 발현될 수 있도록 백성을 가르치고자 했고, 한글 창제는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이 창제한 문자를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란 뜻을 담아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명명했다는 것은 한글을 창제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세종이 한글 창제 이전부터 성리학적 통치이념을 상하 계층 모두와 공유하려 했음은 『삼강행실도』에 대한 세종의 관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한글은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문자로 계획된 것이고, 세종이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의 도리였던 것이다.
성리학적 과학주의를 구체화하는 차원에서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음은 이 책 3장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한국 과학사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홍이섭은 “훈민정음의 창제는 우리 과학사 상에서 본다면 너무나 큰 의의를 갖게 되는 위대한 사업”이라고 하면서, 훈민정음의 창제와 활용을 ‘과학보급정책’의 일환으로 파악하여 한국 과학기술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세종이 중화적 보편성의 구현과 중화문명의 이식에만 머물지 않고 조선의 특수성을 조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음은 당대의 과학기술 성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종에게는 중화문명의 질서라는 틀 내에서 조선의 역사?문화?언어?지리?풍습 등을 반영한 새로운 유교문명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가 근본적인 고민이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세종실록』 기록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풍속이 중국과 다르니, 민간에서 농사짓는 괴로움과 부역하는 고생을 달마다 그림으로 그리고 거기에 경계되는 말을 써서 보는 데 편하게 하여 영구히 전하려고 한다.”(『세종실록』 권26)
“옛사람은 소리에 따라서 음악을 제작했는데, 우리나라 사람은 소리가 중국과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옛 제도를 조사하여 관(管)을 만든다 할 라도 올바르게 된다고 볼 수 없다.”(『세종실록』 권50)
“그러나 방서(方書)가 중국에서 나온 것이 아직 적고, 약명이 중국과 다른 것이 많은 까닭에, 의술을 업으로 하는 자도 미비하다는 탄식을 면치 못하였다.”(『세종실록』 권60)
“공법(貢法)이 비록 좋은 법이기는 하나, 우리나라는 산과 계곡이 험한 것이 중국의 평평하고 넓은 땅과 달라서, 좋은 밭은 적고 척박한 밭이 많은데, 품등(品等)을 나누어 관원이 잠깐 경과(經過)하는 사이에 갑작스레 6등의 밭으로 나누어 좋은 밭을 나쁜 밭으로 하고, 나쁜 밭을 좋은 밭으로 하여, 등급의 법칙(法則)을 그르친 것이 많고,”(『세종실록』 권112)

이러한 고민의 결과, 대표적으로 천문역법에서는 『칠정산내외편』이, 농업기상학 분야에서는 『농사직설』이, 의학에서는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가, 음악과 도량형의 정립에서는 박연을 통한 석경의 제작이 이뤄지게 되었다. 세종은 중화문명의 질서를 지향하였지만, 조선의 특수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투철하였기에 보편과 특수를 아우르는 새로운 성취를 통해 조선을 동아시아 문명국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글의 보급과 확산은 어떻게 이루어졌고, 그것은 과학문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언문(諺文)’이라는 속칭이 의미하듯이, 한글은 사대부층이 아닌 부녀자나 상민 사이에서만 쓰이던 문자였을까? 그러나 기록이나 문건을 보면 사정은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사실, 조선시대 전 계층에서 통용되던 문자는 다름 아닌 한글이었다. 한글은 어떻게 이러한 지위를 얻을 있었을까? 일반 백성들에게 어떤 과정을 통해 확산되고 어떻게 교육을 했을까? 그리고 한글의 확산으로 인해 조선시대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으며 조선의 문명은 어떻게 발전했을까?
조선시대 ‘어리석은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배계층이 훈민정음을 알고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지배계층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훈민정음을 통해 교화를 했던 것일까? 성종 때 간행된 『경국대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경국대전』 내용에서는 『삼강행실』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부녀자와 어린이들에게 가르쳐 이해시키고, 이를 통해 선행하는 자가 있으면 왕에게 보고하라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지배계층의 수장(首長)이나 교육기관인 향교의 선생들이 교화가 이루어지도록 교육하는 집행자였으며, 부녀자나 어린이들이 교화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배계층은 피지배계층을 교화하기 위해서 먼저 훈민정음을 배우고 알아야 했으며, 피지배계층은 지배계층을 통해 훈민정음을 배우고 이를 통해 더 쉽게 ‘교화’되었다고 가정할 수 있겠다. 이 가정에 따른다면 훈민정음은 지배계층으로부터 순차적인 방식으로 보급되었을 것이다.
또한 『실록』에 따르면 세종과 세조 시대에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려는 사람들은 『훈민정음』의 원리와 용례를 충분히 이해해야만 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훈민정음』의 원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운용할 줄 알아야 했고,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도 당연히 『훈민정음』을 공부해야 했다. 따라서 과거시험을 통해 지배계층에 훈민정음이 자연스럽게 널리 보급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향교에서도 한글을 가르쳤을까? 향교에서는 학생들이 한글을 배운 것이 아니라 『훈민정음』의 원리와 『동국정운』, 『홍무정운』 등의 원리를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첫째, 한글은 초등교육 기관인 서당에서 이미 배웠을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며, 둘째, 『훈민정음』과 『동국정운』, 『홍무정운』은 과거시험(문과 초장) 과목이었기 때문이다.
서당은 입학 자격이나 정원이 매우 유동적이었으며,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등이 주된 교재였다. 『천자문』은 한글로 음과 훈을 달아 사용되었고 『동몽선습』, 『소학』 등도 한글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서당은 한글 교육과 보급의 중요한 창구였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서당 훈장이 주석서와 한글 언해본을 참고하며 경서의 뜻을 해독하는 수준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향교나 서당과 같은 교육기관에서만 한글을 가르쳤던 것은 아니다. 일반 가정의 사교육에서도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친 사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17세기 초 작성된 양반 가문의 언문 편지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현전하는 다양한 언문 편지들은 제도권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었던 사대부 집안의 여성들에게 사적으로 한글을 가르쳤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여성들의 한글 사용은 사대부가에 국한되지 않고 왕실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성종의 비(妃)였던 윤씨를 폐위시키는 사건에서도 한글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고, 18세기 『실록』에도 이와 관련한 내용이 여럿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남성 사대부들이 왕실 여성에게 글을 올릴 때도 한글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한편 조선 정부에서는 정치외교상의 문제뿐 아니라 문물 교류를 위해서도 외국어 교육 문제를 구체적으로 고민하였다. 즉, 외국어 교육을 위한 방법론이 논의되었는데, 이러한 방법론적 모색의 과정에서 한글의 가치가 부각되었다. 외국어 교육의 발달은 이중어사전의 개발로 이어졌다. 이 당시 편찬된 이중어사전은 해당 언어의 음을 한글로 전사하여 제시하고 그것에 대응되는 우리말 어휘를 제시하는 것으로 어휘집의 수준에 해당한다. 또한 그 언어의 어구나 문장을 한글로 전사하여 제시하기도 한다.

정보의 대중화와 소통수단으로서의 한글

이 같은 한글의 보급과 확산은 정보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 이전까지 특권 계층이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보 독점의 시대였다면, 한글이 확산되면서 이러한 체계가 무너지는 양상이 나타났다. 사대부 남성 계층에 국한되었던 지식과 정보가 점차 하층 계층으로 확대되고 여성 계층도 지식과 정보의 생산 주체로서 서서히 등장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정보 대중화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한글이었다. 한글이 창제되자마자 10년도 안 되어 조선 사회는 일대 변혁을 겪는다. 한글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편지를 주고받고, 자신의 주장을 알리는 데에서 새로운 소통도구로 자리 잡았다. 한글은 조선의 과학문명을 대중화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전문서나 과학실용서 등이 한글로 번역되어 민간에 널리 퍼져나가면서 정보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정부와 일반 백성 간 소통수단으로서 한글의 역할을 보여주는 사례는 임진왜란 당시에 보인다. 피난 중에 선조는 백성들에게 원성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임금을 누가 좋은 눈으로 바라보았겠는가. 더 나아가 지배계층이던 양반과 관리들이 보여준 실망스러운 모습 또한 선조에게는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키고 노비들이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운 일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선조의 언문 교지는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등장한다. 민심을 달래고 또 한편으로는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이 읽을 수 있는 한글로 교지를 내린 것이다.
과학문명사적으로 특기할 것은 여러 과학실용서가 민간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한글로 언해된 의서(醫書)와 병서(兵書)나 농서(農書) 그리고 조리서(調理書) 등을 들 수 있는데, 한문으로 쓴 것을 한글로 언해하거나 한글로 직접 써서 책으로 간행하였다. 이들은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과학지식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공유되었다. 그러나 한글이 일반 백성에게 확산되자 이러한 전문 정보들이 민간에 널리 유포되고 이를 백성들이 빠르고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따라서 한글의 보급이야말로 조선의 과학문명을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결정적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 중후반에 등장한 한글 소설은 대중의 문화생활에 새로운 전기를 제공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도 소설이 없지 않았으나 대부분 짧은 설화를 한문으로 옮기거나 중국 소설의 문체를 흉내 내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수많은 한글 소설이 등장하면서 세책(貰冊)과 방각(坊刻)이라는 새로운 유통방식이 등장하게 된다. 즉, 한글 소설의 상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한글 소설을 빌려보거나 팔고 사는 방법이 없지 않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과 개인 간에 이루어진 거래였다. 세책이란 전문적으로 책을 베껴 쓴 다음에 이를 대여해주고 돈을 받는 방법이며, 방각은 손으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판매할 목적으로 서방(書坊) 등에서 목판으로 판본을 만들어 대량으로 찍어내던 방식을 말한다. 한편, 이즈음 거리에서 소설을 읽어주면서 돈을 벌었던 이야기꾼[강담사(講談師), 강독사(講讀師)]이 등장하기도 했다. 18세기 후반에는 길거리에서 『심청전(沈淸傳)』이나 『숙향전(淑香傳)』 등의 한글 소설을 읽어주는 강담사가 유행이었는데, 이들이 읽어주는 한글 소설에 백성들이 얼마나 몰입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정조 때 종로거리 담배 가게 앞에서 강담사가 짤막한 야사(野史)를 들려주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구경꾼이 이야기 속의 영웅이 어려움을 당하자 그 분을 이기지 못하여 강담사를 살해하였다는 기록이다.

근대화의 초석, 한글

1894년 갑오개혁으로 한글은 국문이 되었다. 국문이 된 한글은 일반 대중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쳐 근대 문명의 초석이 되었다. 한글이 창제되고 450여 년 동안이나 조선 사회에서 국문으로서 지위를 획득하지 못했던 한글은 어떻게 국문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을까? 그리고 한글이 국문이 되었다는 것은 문명사의 관점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19세기는 서구 열강 아시아를 침략하기 시작한 시기다.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중국이 서구 열강에 고개를 숙이고, 일본은 제대로 한 번 힘도 써보지 못하고 미국에 무릎을 꿇고 말았으며, 조선은 다시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동아시아 나라들이 서구 열강의 침탈에 이처럼 속절없이 당한 것이 단지 총과 대포를 앞세운 서구 열강에 패배했음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중세적 질서가 서구문명에 의해 해체되었음을 뜻한다.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중세적 질서가 와해된 상태에서 동아시아 각국은 각자의 방식으로 서구문명의 근대적 질서에 편입되기 위해 박차를 가하게 된다. 갑오개혁은 조선이 중국 중심의 질서를 타파하고 서구의 근대적 질서로 편입됨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갑오개혁의 주체인 개화파들은 한문을 보조적인 글쓰기 수단으로, 국문 또는 국한문(國漢文)을 주류적인 글쓰기 수단으로 공식화했다. 글쓰기 수단의 변화를 추동하는 조치의 의미는 문화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민족 정체성의 인식’, ‘민권의 향상’, ‘정치적 자주 선언’ 등의 해석이 그것이다. 그런데 과학문명사적 측면에서 이 조치의 의미를 음미해본다면, ‘서구문명의 도입과 중국문명과의 결별’이라는 근대적 개혁의 특징을 보다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조치의 목표 중 하나가 ‘한글을 매체로 서구문명을 도입하고 이를 확산하자는 것’이었음은 각종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선진적인 기술서적이 번역되고, 계몽과 위생을 위한 서적의 번역이 잇따랐으며, 이윽고 <독립신문>이라는 한글 신문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5장에서는 근대화 과정에서 한글의 역할과 양상 변화를 살핀다. 또한 한글기계화로서 한글타자기의 등장 과정, 한글 스마트폰 글자판에서 나타난 “천지인”의 과학적 원리, 지니톡에서 보이는 한글의 음성 인식의 우월성 등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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