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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막일기 북평사 박래겸이 남긴 254일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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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막일기 북평사 박래겸이 남긴 254일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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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67352721
쪽수 : 292쪽
박래겸  |  글항아리  |  2016년 0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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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북막일기』는 저자인 박래겸이 1827년 7월 14일 북평사 관직이 내려진 뒤부터 1828년 4월 2일 도성의 자택에 당도할 때까지의 기록을 담았다. 북평사 고유의 업무들도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여러 차례의 과거시험과 백일장에서 주최·출제·채점을 맡는 등 전방위로 참여한 행적을 담았을 뿐 아니라 출제한 문제까지 상세하게 제시해두어 조선시대 지방에서 치르는 과거의 전모가 어떠했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저자 소개
저자 박래겸은 본관은 밀양, 자는 공익公益, 호는 만오晩悟·탑서塔西다. 경상도 구미 봉곡에서 박선호朴善浩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10년부터 1811년까지 가주서假注書로 봉직했고, 그 후 주서, 정언, 지평, 장령 등을 역임했다. 1819년 부안 현감에 임명되었다. 1822년 암행어사에, 1827년 함경도 북평사에 제수되었다. 또 1829년 영의정 이상황이 심양 정사로 갈 때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수행했다. 그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마흔세 살에 평안남도 암행어사의 체험을 담은 『서수일기西繡日記』, 마흔여덟 살에 함경도 북평사 때의 공무를 기록한 『북막일기北幕日記』, 쉰 살에 서장관으로 심양을 다녀온 견문을 담아 『심사일기瀋使日記』를 씀으로써 총 세 권의 일기를 남겼다. 1833년 예조참판으로 있을 때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두 번째 연행을 다녀왔다. 1837년부터 1840년까지 여러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신병을 핑계로 사직했다. 저서로는 『탑서유고초塔西遺稿抄』 『만오유고晩悟遺稿』 등이 있다.
목 차
목차 머리말 7월 | 013 8월 | 023 9월 | 081 10월 | 105 11월 | 151 12월 | 161 1월 | 175 2월 | 189 3월 | 201 4월 | 235 박래겸의 공무 여행 루트 원문
출판사 서평
출판사 서평 조선 관료가 쓴 일기, 길 위에서 이루어진 업무 그 바쁜 걸음과 객지의 유숙 속에서 틈틈이 즐기는 여행과 풍류 조선시대 공무公務의 면면이 매일의 기록 속에서 드러나고 하루하루 깃든 피로는 인간?의 향내를 풀풀 풍긴다 조선의 선비, 지방으로 출장을 떠나다 저자인 박래겸의 본관은 밀양, 자는 공익公益, 호는 만오晩悟·탑서塔西다. 1822년 암행어사에, 1827년 함경도 북평사北評事에 제수되었다. 북평사는 조선시대의 정6품 무관 벼슬로 원래 이름은 병마평사였으나 줄여서 북평사 혹은 평사라 불렀다. 외관직外官職이었으며 영안도(함... 조선 관료가 쓴 일기, 길 위에서 이루어진 업무 그 바쁜 걸음과 객지의 유숙 속에서 틈틈이 즐기는 여행과 풍류 조선시대 공무公務의 면면이 매일의 기록 속에서 드러나고 하루하루 깃든 피로는 인간의 향내를 풀풀 풍긴다 조선의 선비, 지방으로 출장을 떠나다 저자인 박래겸의 본관은 밀양, 자는 공익公益, 호는 만오晩悟·탑서塔西다. 1822년 암행어사에, 1827년 함경도 북평사北評事에 제수되었다. 북평사는 조선시대의 정6품 무관 벼슬로 원래 이름은 병마평사였으나 줄여서 북평사 혹은 평사라 불렀다. 외관직外官職이었으며 영안도(함경도)와 평안도에 각 한 명씩 파견했다. 즉 북평사는 우후와 함께 각 도의 주장인 병마절도사의 막료로서 업무를 보좌하는 관직이었다. 『북막일기』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으로, 1827년 7월 14일 북평사 관직이 내려진 뒤부터 1828년 4월 2일 도성의 자택에 당도할 때까지의 기록을 담았다. 북평사의 주된 임무는 문부文簿를 관장하고 군자軍資와 고과 및 개시開市 등을 주관하는 것이었다. 또한 병마절도사에게 사정이 생기면 도내 순행과 군사훈련, 무기 제작과 정비, 군사의 군장 점검, 군사시설 수축 등을 대행했는데 기간은 통상 2년이었다. 박래겸은 북평사로 재직하는 254일 동안 총 6070리를 다녔다. 그리고 이 기간에 일어난 모든 일을 날짜별로 세세하게 정리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조선시대에 공무를 담당한 한 직책인 북평사의 이동 경로와 일정, 각 업무와 길에서 소요한 시간 등을 구체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북막일기』에는 북평사 고유의 업무들도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여러 차례의 과거시험과 백일장에서 주최·출제·채점을 맡는 등 전방위로 참여한 행적을 담았을 뿐 아니라 출제한 문제까지 상세하게 제시해두어 조선시대 지방에서 치르는 과거의 전모가 어떠했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공시公市, 사시私市, 마시馬市 등을 직접 개장하기도 했던 박래겸은 구체적인 일시와 물품도 적시해 당시의 대청對淸 무역 상황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북평사가 무관들에게 무예를 시험하거나 포상하는 모습, 순찰사와 병마절도사를 배알하는 의식, 관리들 상호 간의 알력관계, 군예軍禮의 실제 모습 등도 이 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박래겸은 그가 근무하던 지역인 함경도의 풍속과 풍토까지 세밀히 그려냈으며 당시 국경이 닿아 있던 호인의 모습도 기록해두었다. 이것이 바로 『북막일기』가 단순히 개인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조선의 역사를 알려주는 자료로서 그 가치를 지니는 이유다. 그가 활동하던 서북 지역은 현재까지도 많은 부분이 미답의 경지로 남아 있다. 그런 만큼 이 책은 귀한 연구 자료가 될 뿐 아니라 읽을거리로서도 손색이 없다. 생소한 서북 지역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다 북평사는 함경도와 평안도 각 두 곳에 한 명씩 파견되었는데, 박래겸은 자신이 담당했던 지역인 함경도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남긴다. 이곳 출신이 아니었던 그에게 오랑캐와 맞닿아 있는 서북 지역의 모습은 서울과 크게 달랐다. 일기 곳곳에서는 그가 이런 낯선 분위기와 풍광에 경계심을 지닌 모습이 드러난다. 이에 대한 서술은 박래겸이 본격적으로 공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8월 초부터 등장한다. 추석이었던 8월 15일, 박래겸은 경성으로 가는 길에 의관을 갖춘 남자와 소달구지에 탄 아녀자들이 도로를 메웠다고 묘사했다. 함흥 이북은 들이 넓어 집집마다 둔 거가車駕로 곡식이며 땔감을 옮겼다. 그뿐 아니라 심지어 혼인하러 오가는 길에도 두 소달구지를 이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풍속은 운송 수단이 마땅찮았던 서북 지역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박래겸은 이곳의 풍속이 관서 지방보다 어리석어 훨씬 못하다고 적었는데, 이러한 묘사는 이후로도 계속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놀라게 했던 것은 오랑캐 풍속이 깊숙이 배어든 무산의 정경이었다. 기후 때문에 나무 등이 부족해 지붕을 흙으로 덮은 모습이 생소했지만, 한편으로는 서울처럼 번화한 모습의 사람과 사물을 보고 그 괴리가 기이하게 여겨졌다고 적고 있다. 특히 흙을 덮은 지붕에 대해 그는 “삶을 즐기는 뜻이 없다”고 표현했는데, 나무가 거의 없는 서북 지역의 정경에서 크게 이질감을 느꼈던 듯하다. 이와 비슷한 서술은 그 뒤에도 이어진다. 8월 23일 삭역루에 오른 그는 북쪽 바람의 쌀쌀함에 언짢음을 느꼈다고 적었다. 10월 13일, 조선의 최북단인 온성부에 도착한 박래겸은 성곽과 마을은 웅장했으나 나무가 한 그루도 없어 산의 정경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소회를 남겼다. 3일 후 그는 황척파라는 곳에서 점심을 들었는데, 그곳은 북관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진鎭이라 성첩과 관청이 상당히 변변찮다고 썼다. 한편 10월 19일에는 눈이 내렸는데, 그 양이 대단하여 서까래는 흰 흙을 바른 것 같았으며 처마 위에는 눈이 몇 자나 쌓였다고 했다. 또한 박래겸이 묵는 방의 이중문까지 뚫고 들어와 문짝이 수도 없이 넘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고을 사람들은 이를 두고 큰 바람이 아니라고 했다. 정말 큰 눈보라가 오면 방 안이 대낮에도 옻칠한 듯 깜깜한데, 이런 일이 해마다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당시 북쪽의 기후가 얼마나 혹독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마찬가지로 10월 말이 지나 본격적인 겨울에 접어들자 박래겸은 감기에 앓아누웠다는 기록을 자주 남겼다. 북쪽 특유의 날씨에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던 것으로 셈이다. 함경도가 조선 국경의 끝에 위치해 있는 만큼 박래겸은 오랑캐의 모습을 쉬이 관찰할 수 있었다. 10월 17일에는 고이도에 가서 사냥을 했는데, 호인의 마을이 가까이에 있어 그 아이들이 사냥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박래겸 일행을 보자 서서 자기들끼리 조잘대고 있었으나 그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10월 21일에는 가마를 타고 가다가 북호의 마을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사이에 있는 강이 얼어붙어 다른 나라라기보다는 같은 마을처럼 보였다고 쓰고 있다. 오랑캐의 풍습이 짙게 배어든 마을과 허술한 국경 수비 현장을 겹쳐 보며 박래겸은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던 듯하다. 6박7일의 강행군으로 백두산을 등정하다 8월 24일, 박래겸은 평생의 숙원이었던 백두산 등정길에 오른다. 고을 수령과 종성 수령이 함께했던 총 620리의 여정에서 그는 공적인 임무를 수행할 때는 겪지 못했던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촌락의 주민들에게 치재를 권유받기도 하고, 동행한 사람들과 대홍천의 우거진 수풀을 두고 나무들을 전부 연결하면 어디에 이르겠냐는 일종의 선문답을 주고받기도 한다. 그는 이곳저곳을 오르내리며 주변 풍광을 완상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박래겸은 두만강에 대해서는 큰 강인 줄 알았으나 이제 보니 하나의 큰 냇물일 뿐이라고 평했고, 소홍단小紅湍에 이르러서는 인간 세상이 아닌 것 같다는 감상을 남겼다. 그 외에 도원동과 다를 바 없었다는 임강대臨江臺와 화려한 정경을 뽐내는 삼지연三池淵, 신이 깎거나 귀신이 새긴 것 같은 모습의 천지 등 그의 백두산에 대한 기록은 한 편의 유기游記로 읽어도 충분할 만큼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백두산을 향해 떠난 지 4일이 지난 28일, 백두산정계비에 다다른 박래겸은 북쪽을 바라보며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고 적었다. 스스로 적을 크게 깨부순 뒤 기념으로 비문을 세우고 싶은 뜻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는 곧 그곳에 살고 있는 오랑캐를 정벌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무관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마음가짐을 내비친 것으로, 북호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서북 지역을 주로 다녔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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