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운영 지음 | 문학동네
여성의 원초적 생명력을 바탕으로 도발적인 서사와 관능적인 미학을 선보여온 소설가 천운영이 십 년 만에 소설집 <반에 반의 반>으로 독자 곁을 찾았다. 신동엽창작상, 올해의 예술가상을 수상하며 일찌감치 이야기꾼으로서의 저력을 보여준 작가는 그동안 취재에 기반한 생생한 장면 구성과 허위를 부수는 담대한 묘사, 터부에 홀연히 손을 뻗어 이야기 속으로 데려오는 과감함으로 한국문학에 전에 없던 궤적을 그려왔다.
<반에 반의 반>의 아홉 단편에서 들려오는 것은 세대도, 삶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른 여성들의 목소리다. 다종다양한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연이 닿은 이들에게 무람없이 먹을 것과 잘 곳을 내어주는 ‘다정함’이 바로 그것이다. 본처 자식들에게 쫓겨난 둘째 시어머니를 다시 거둬들여 평생을 함께하는 며느리(「우니」 「내 다정한 젖꼭지」), 꽃놀이 가는 길에 만난 어린 오누이를 집에 들이고 아껴둔 이부자리를 건네는 할머니(「봄밤」). 가족을 넘어 더 많은 존재들의 생존 그 자체를 긍정하는 이 다감(多感)의 계보는 계속해서 아래로 아래로 전해내려갈 듯하다.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우리가 모르는 이면이 있을까. 천운영은 ‘반에 반에 반’의 상상을 더하여 그 맹렬하게 아름다운 순간을 발견한다. 표제작 「반에 반의 반」의 큰아버지에게 자신의 어머니는 전쟁의 와중, 부지런히 가족의 목숨줄을 지켜내던 강인한 여성으로 기억되지만, 다른 자식들에게는 여름날 계곡에서 아이처럼 물장구를 치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손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큰아버지 또한 할머니와 함께 물놀이를 하는 장면을, 부끄러움 없이 환한 풍경을 상상해본다.
소설가 윤성희의 추천의 말처럼 이 환한 풍경은 문장을 넘어 목소리가 되고, 혀끝으로 느껴지며, 마침내 읽는 이의 온몸을 통과한다. 천운영의 천연덕스러운 솜씨로 버무려진 이 시대 여성들의 생생한 삶이 여기, <반에 반의 반>에 펼쳐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