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주희 지음 | 파란
그곳이 지옥이라 한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듯이
“고주희의 첫 시집은 ‘당신을 앓는 나’가 가학적인 치유의 역설을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쓴, 상실의 체험에 관한 섬세한 심리 진술서의 성격을 지닌다. 병증의 언어를 시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은 어떤 형태로든 미학적 지향성을 내포하며, 고통에 대한 미적 거리감은 삶과 존재에 대한 성찰의 거리감으로 변주된다. 그런데 고주희의 작업은 통상 시가 병증의 언어들을 흡수하는 내면화와 승화의 방식과는 다른 경로를 걷는다. 고주희는 가능한 깊이, 최대한 충실하게 앓기를 원하는 듯하다. 여기에 고통에 대한 쓰라린 탐닉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고주희의 시에서 ‘나’가 고통을 대하는 자세는 고통의 기원인 당신을 대하는 자세와 분리될 수 없으며 분리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당신을 상실한 고통을 앓는다.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데, 나의 의지로는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나의 의지로 멈추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과 고통은 나의 것임에도, 그 중심은 나의 의지와 능력이 닿지 않는 외부에 있다(또한 나의 내부에 있다).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당신을 상실한 고통을 계속 앓는 일과 일치한다. 당신이 없는 지금-여기는, 사랑의 윤리와 고통의 윤리가 일치하는 불행하면서도 행복한 장소다. 나는 상실을 메우기 위해 ‘당신’을 다른 누구로 대체하지 않는다/못한다. 처음부터, 그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당신은 유일하며, 당신의 유일성은 절대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다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을 사랑한 것과 같이 사랑할 수는 없다. 나에게 애도는 상실을 처리하는 생존의 기술을 넘어, 상실의 텅 빈 시간에도 당신을 계속 사랑하는 능력이며, 삶의 모든 순간을 ‘사랑의 주체’로 살아가려는 윤리적인 의지이자 실천이다. 흠 없는 완전한 애도가 애도를 끝내고 망각을 시작하는 것이라면, 변함없는 온전한 애도는 애도의 원천인 사랑을 계속하는 것이다. 온전한 애도에서 기억은 애도의 목적이 아니라 사랑의 부산물이다. 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완전하다’는 “필요한 요소를 모두 갖추어 부족함이나 결함이 없다”를, ‘온전하다’는 “변화되지 않고 본바탕대로 고스란하다”를 의미한다. 고주희의 애도는 후자에 속하는데, 온전한 애도-사랑의 한 사례를 고주희는 성경의 욥기를 재구성한 여성 작가의 소설을 참조해 이렇게 기록한다. “천 번의 태풍을 맞이하며 몸속에 기꺼이 아비와 아들을 새긴/그녀는 생존자였다”(?욥의 아내?). 아무런 죄 없이 신이 내린 수난에 처한 ‘그녀’는 사랑하는-잃어버린 이들을 온몸에 고통스럽게 새기며 변함없이 사랑한다. 그녀가 살아남은 것은 상실을 처리함으로써가 아니라 상실 속에서도 사랑을 계속함으로써였다.”(이상 김수이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